시집에서 읽은 시

만년필/ 서상만

검지 정숙자 2013. 4. 21. 17:42

 

 

    만년필

 

    서상만

 

 

  그럼 이제 저녁연기로 편지를 쓸까

  겁 없이 천년도 아닌 만년을

 

  그래도 글쟁이라고

  날이면 날마다 밭고랑 같은 원고지에

  깨알같이 생각을 뿌리더니

  제대로 싹 한번 내지 못했다

 

  어느 시인은 이 작은 삽날로

  주옥같은 시를 쓰고, 어떤 이는

  생각을 갈아엎어 깊이 파내려가더니

  그것이 숟가락이 되어 밥을 벌고

 

  누구의 서투른 수사나 칼날의 벼리를 물고

  오도독 이빨을 갈며

  오랜 날, 불 꺼놓고 기다렸다

  이 독방의 침잠

 

  나는 허울 좋은 막대기였구나

  제대로 고랑 한번 낸 적 없는

  내 물음에 빤히 나를 올려보는

  푸른 만년필

 

 

   * 시집 『적소 謫所』에서/ 2013.3.25 <서정시학> 펴냄

   * 서상만/ 경북 포항 호미곶 출생, 1982년『한국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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