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2(부분)/ 테러 유감 : 이현승

검지 정숙자 2024. 11. 21. 01:25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2 (부분)

 

       이현승

 

 

       테러 유감 

    빌런과 악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 가 보자. 앞(지난 연재)에서 「삼체」의 세계관이 삼체식의 영웅상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군인, 전술 지도자, 그리고 물리학자가 포함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인류의 운명을 군인과 물리학자가 결정한다는 것은 군인과 물리학이 최종적인 지혜여서가 아니라, 인류가 처한 상황이 종말이고 절체절명의 싸움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고, 무엇보다 삼체가 SF 장르여서 만들어진 기울기일 것이다. 과학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휴머니즘과 창의성으로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고 있는 현실이니까.  지금까지는 세계성에 대한 언표가 주로 문학과 철학자들을 통해서 이야기되어 왔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인 휴머니즘도 아마 종래의 철학과 문학이라는 요람에서 자란 탓이겠다. 그러니 진짜 우리가 세계의 종말에 대해 몽상해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철학과 문학의 인간을 우선 참고해야 할 것이다. 시인이 최후의 전사가 되지는 않겠지만 시인의 몽상이 최후의 인간이 치러야 할 어떤 사고와 감각의 과정이 아니라고 부정할 도리는 없다.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최후의 인간은 시인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의 한 귀퉁이에서 그 시인이 펜이 아니라 총으로 제 나라의 총리를 쏴 버린 것이다. 유라즈 신툴라가 어떤 사람인지, 하다못해 그의 시 한 편 읽어 보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국 성급한 일반화가 되겠지만, 총기 테러를 자행한 이 시대의 빌런이 하필 시인이었다는 점은 유감이다. 자기중심성과 인간에 대한 편협한 이해, 그리고 문제 해결에 대한 강박이 만나면 유라즈 신툴라 같은 빌런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가장 중요한 임무의 실행 수단으로 펜이 아니라 총을 선택한 이상 그에게 시는 그렇게 중요한 수단은 아니었다고 자인한 셈이다. 그에게 최선의 무기가 언어였다면 현재의 시점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을지라도 그에게 장차 역사적 복권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거창하게 복권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성이나 휴머니즘의 어떤 특수한 지점이 그가 창안한 언어로 명명되는 영예를 누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무엇보다 예술에는 폭력에 저항하는 부해함, 무용하지만 아름다움이 있었을 테니까.

     가십성 보도로 끝나 버린 언론의 빈곤한 정보에 의하면, 유라즈 신툴라는 쇼핑몰 경비원으로 일한(30년 동안) 경력 덕분에 합법적인 총기 소유의 권한이 있었다. 또 그가 시집을 세 권 냈고,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에 등재된 시인이라는 사실, 그의 최근 시에는 극우적인 성향의 구호도 포함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피격된 총리가 러시아적인 태도를 가진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AI 관련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점점 가시화하고 있는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나, 디지털과 자동화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역설적인 소통 부재,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고도 경쟁사회의 피로감과 만연한 혐오 속에서 점점 더 경제 동물로 격하되고 있는 인간 실종 등 이 모든 '위기'에 대해서 나는 얼마간 예술과 미학을 대안적 가치로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인 테러리스트의 등장은 깊은 유감이었던 것이다. 연동된 문제겠지만 인간과 휴머니즘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문학장 안에서 문학의 위상도 얼마간 지지부진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자신의 책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서 인간의 파편적 사고, 편협성을 보완할 수 있는 총체적 사고의 함양이 미학 교육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실러는 프랑스대혁명의 환희가 단두대의 처형의 광기로 변질된 것은 대혁명의 바탕을 이루는 계몽주의가 지나치게 오성과 이성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이러한 인간의 사고의 파편화에 대해서는 감성의 계발을 통해 총체적 사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믿음의 신봉자이다. 인간이 얼마나 무르고 여린, 약해 빠진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는 데 있어서 나는 문학과 시가 여전히 유효하고도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문학장의 위축조차도 문학의 본질을 위축시키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의학적 발달이나 경제적 번영에도 종래의 휴머니즘을 위축시키는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의학의 발달로 우리는 덜 아프게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결과 우리는 이전 시대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가질 수 있었던 수용력보다 더 못하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의 고결함이나 용기란 생사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단련되어 온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마취제의 사용이 우리 정신을 그만큼 무력하게 만들고 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다른 문명의 발달은 또 어떤가. 교통의 발달이나 통신 기술의 혁신적인 발달은 인간의 활동 반경을 넓히고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었지만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자에 대하여 더 즉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p.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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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4-여름(34)호 <serial / 직업으로서의 시인 연재 3회> 에서    

  이현승/ 시인,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대답이고 부탁인 말』, 저서『얼굴의 탄생  한국 현대시의 화자 연구』『김수영 시어 사전』(공저), 『김수영 시어 연구』(공저), 『현대시론』(공저), 『이용악 전집』(공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