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위대한 유언, '나를 화장하라!'/ 강소연

검지 정숙자 2024. 10. 29. 16:26

<예술>

 

    위대한 유언, '나를 화장하라!'

 

    강소연/ 동국대 징계위원회 위원

 

 

  경주에 가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는 엄청나게 큰 반구형 왕릉들이 인상적이다. 옛 왕경의 중심이었던 황룡사지의 서쪽 방향으로 약 150여 개가 넘는 거대한 왕릉들이 즐비하다. 대릉원(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 등)을 비롯하여 금관총과 봉황대 등의 고분군은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다. 고분의 크기를 보면, 길이(또는 지름)가 20-30미터에 높이는 8-12미터의 보통 크기가 있는가 하면, 길이가 120미터에 높이가 24미터에 달하는 황남대총과 같은 초대형 고분도 있다.(도판 15) 왕릉에서는 왕의 시신을 장식하였던 금관, 허리띠, 칼, 관모, 신발, 귀걸이 등 다채로운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덤 내부를 관람할 수 있게 공개해 놓은 천마총을 들어가 보면,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얼마나 많은 재물이 왕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동원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왕의 사후 세계는 살아 있을 때 만큼이나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p. 240)

  

  무덤에 크기는 왕의 성취한 권력과 위업에 비례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위대한 삼국통일을 이루어 '문무대왕'이라 칭송되는 문무왕의 왕릉은 얼마나 크고 장대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무왕의 무덤은 없다. 화장(火葬, 시체를 태우고 남은 유골로 장사를 지내는 불교식 장례 방법)을 하였고 뼛가루는 바다에 뿌려졌다. 한 줌의 하얀 뼛가루는 바닷바람에 풀풀 날리며, 밀물과 썰물 위로 눈가루처럼 떨어졌다. 바람과 바닷속으로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열흘 후, 궁 문밖 뜰에서 인도식으로 화장하거라.(삼국사기)"라는 유언을 남겼다1).  그리고 장사를 지낸 곳은 동해 감포 앞바다의 큰 돌(대왕석)이 있는 곳이었다. (도판 16) 후대 사람들이 문무왕의 왕릉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여 큰 돌 있는 이곳을 수중水中 왕릉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통일신라 시대가 열리면서, 기존의 매장 형식의 장례문화는 문무왕의 이 유언을 계기로 화장 형식으로 바뀐다. 무수하게 남아 있는 왕릉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오래된 전통적 장례문화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전환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문무왕이 불교식 화장법으로 스스로 본보기를 보이지 않았다면, 경주 시내 일대는 온통 대형 무덤으로 뒤덮이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장례방식의 전환으로, 더 이상 그 많은 백성들이 매 해 무덤 건립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또 더 이상 그 많은 재물이 시신을 장엄하느라 쓰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문무왕의 "상례를 절약하고 검소하게 치르라(喪制度務從儉約)"라는 당부를 통해 보더라도, 얼마나 그 폐해가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무왕이 큰 사람으로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업적을 거대한 왕릉으로 칭송하려는 명예욕이 일체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문헌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인품은 매우 (매장문화라는 허례허식을 근절할 만큼) 현실적이었고, (구 제도의 모순보다는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바로 적용할 만큼) 현명하고 대담하였으며, '나'라는 개인보다는 '국가'라는 공공의 목표가 우선시되는 인물이었다.

 

  "대왕이 (중략) 죽으니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遺詔葬於東海中大嚴上). 왕은 평소에 늘 (중략) 말했었다. "나는 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려 하오(朕身後願爲護國大龍)."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 법민 중에서

 

  문무왕은 대내적으로 나라의 경제와 인력을 아꼈고, 대외적으로는 호법護法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 했다. 왜구가 신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침략했던 포구였던 감포 앞바다. 그곳에서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문무왕의 간절한 유언. 그리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크기도 압도적인 위풍당당한 감은사탑과 감은사(본래 명칭은 나라를 지킨다는 뜻의 '진국사')를 완성하여, 아버지의 뜻을 기렸다. 괴체감 넘치는 육중한 감은사 동탑과 서탑은 왜구를 당장에라도 진압할 기세로 굳건히 천년 세월을 넘어 서있다. 당시 불교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또 불법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의 의지가 얼마나 팽배했었는지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호법 및 호국 정신은 감은사탑 출토 사리구의 장엄에서도 십분 확인할 수 있다. (p. 242~243)

 

 (도판 15) 경주의 신라시대 왕릉, 봉황대 고분군. ( 블로그註: 책에서 감상 要/ p. 241-上)

 

 1) "신하들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臣以遺言 葬東海口大石上). 민간에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고 전해지며,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부른다. (중략) 내가 죽으면 열흘 후 궁 문밖 뜰에서 인도식으로 화장하라(便於庫門外庭依西國之式 以火燒葬)." 『삼국사기』 중에서 문무왕 장례 관련 기록.

 

 (도판 16) 문무왕의 유골이 뿌려진 곳, 경주 감포 앞바다의 대왕석, 현재는 대왕암 또는 문무대왕암이라 칭한다. (블로그註:  책에서 감상 要/ p. 241-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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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가을(78)호 <예술_'스투파-솔도파-탑파-탑'의 원리> 에서

 * 강소연/ 중앙승가대학 교수(문화재학), 현) 문화재청 전문위원, 조달청 전문위원, 동국대 징계위원회 위원, 조계종 성보문화재위원, 경기도 사찰보존위원회 위원 등, 저서『사찰불화 명작강의』(불광출판), 『명화에서 길을 찾다』(시공아트), 『삶이 苦일 때, 붓다 직설과 미술』(불광출판사)등,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성균관대학 연구교수,⟪조선일보⟫ 전임기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