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법문사/ 지주혜

검지 정숙자 2024. 10. 31. 16:30

<기행>

 

    2024. 7. 26./ 금) 인천→ 서안→ 법문사

 

    지주혜/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티베트-실크로드 돈황 인문학 기행의 첫날 일정은 서안에 도착 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법문사에서 시작되었다. 법문사는 후한(後漢 147~189, 42년간)의 환제桓帝 · 영제靈帝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본래 이름은 아육왕사(阿育王寺, 아쇼카왕사)였다. 형제 99명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아쇼카는 뒤늦게 이를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한다. 제3차 결집을 후원하는 한편 포교를 위해 부처님이 남긴 사리를 나라 안팎으로 보낸다. 이때 석리방釋利房 등 18명의 스님들은 진신사리 19과를 가지고 험난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목숨을 건 여정 끝에 중국에 도착했지만 불법이 꽃필 수 있는 여건은 무르익지 않아 이들은 부처님 사리를 서안 인근의 성총에 묻었다고 한다. 

  부처님 사리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인도 서북부 안식국安息國의 왕자 안세고安世高에 의해서였다. 왕위를 버리고 불문에 귀의했던 안세고는 역경승譯經僧으로 이름을 떨쳤다. 어느 날 밤 대지에서 솟아오른 광채가 하늘을 가르며 북두칠성까지 이어져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긴 안세고가 그곳을 파보니 산스크리트 문장이 쓰인 7개의 푸른 벽돌과 함께 진신사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지골사리를 봉안해 조성한 사찰이 아육왕사, 오늘날의 법문사이다.

  이후 법문사는 당나라 황실사찰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스님 5000명이 수행하며 부처님 법을 받들었다. 뿐만 아니라 30년에 한 번씩 봉행했던 공양의식은 황실이 주도하는 국가적 행사로서 법문사의 위상을 드높였다. 하지만 법문사는 당나라의 몰락과 더불어 쇠락하여 결국 9세기 후반, 당 의종懿宗은 진신보탑 지하궁전을 봉해버렸고 지골사리는 전설 속 존재로 남게 된다. 1568년과 1609년 대지진으로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던 진신보탑은 1976년 지진으로 또다시 기울어지는 참사를 겪었다. 1981년 8월에는 열흘 이상 격렬한 폭우가 휘몰아치면서 탑의 서남 측 대부분이 함몰됐다. 중국정부가 복원공사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지하궁전에 밀봉되었던 지골사리가 사람들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다고 한다. 

 

  티베트 실크로드 답사 첫날에 본 중국의 느낌은 모든 게 다 크다는 것이었다. 법문사 절도 엄청 컸다. 예전에는 스님이 절의 문을 닫으로 갈 때 말을 타고 갔다고 한다. 우리 답사팀도 입구에서 전동차를 타고 제법 달려 사찰 건물에 도착했다. 법문사는 원래의 절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절로 구성되어 있고, 전동열차를 타고 절 안에서 이동할 때 불보살님들의 커다란 조각상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어 마치 우리가 거인국에 도착한 걸리버와 같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다 거대하고 스케일이 한국과 달랐다. 중국은 나무가 없는 산이 많은데 흙이 아니라 암석으로 되어 있어서 산의 맨살이 그대로 보인다. 지진 같은 큰 힘에 의하여 지각이 변형된 흔적이 보인다. 산줄기는 마치 문어가 다리를 뻗듯이, 나무가 가지를 치듯이 큰 힘이 뻗어 나간 느낌을 주었다. 산도 봐도봐도 질리지 않고 신기해 보였다. (p. 2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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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가을(78)호 <기행/ 티베트-실크로드 돈황, 인문학 기행 12일> 에서

 * 지주혜/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