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외 1편
이만식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길가의 풀 한 포기에 의식이 있었다면
그리도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지는 않았겠지.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가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풀이 지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겠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동물원에 갇혀있는 사자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아무리 정교한 포위망을 구축해놓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사람이 지배자가 되기 전에 사자가 제압했겠지.
사자의 강력한 힘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전문(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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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혁명'의 조건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는데
'문학의 죽음'이라는 엄살이 통할 때도 있었다.
정치의 현실을 바꾸는 게 먼저인지
지성의 수준을 높이는 게 먼저인지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의 논전을 지켜보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뮤즈를 믿고 그냥 읽거나 쓸 수는 없다.
굳이 만들어내야 할 '문학혁명'의 조건을 따져보자.
'나'를 찾지 못해, 그리고
'나'의 자리를 몰라 혼란스러워했던 건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부터
『어벤저스 4: 엔드게임』의 화려한 성공과
『엑스맨: 다크 피닉스』의 처참한 실패, 그리고
방탕소년단의 아미에 이르기까지 늘 있었던 일,
하지만 '죽음의 깊이'에서 만나는
동서양 사상 융합의 자리는 누가 만들고 있나.
'우리'의 갈 길만 고수하다
'형제'를 죽이게 되는 곤혹스러움은
캔 로치가 『보리밭에 부는 바람』에서 보여줬고,
'타자'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영역에 대한 보존을 넘어설 수 없음은
봉준호의 『기생충』이 확인해주고 있는데,
하지만 '다가올 민주주의'가 일어설
'새로운 공동체'로 묶어낼 '정동'의 체계는 누가 만들고 있나.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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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문학혁명의 조건』에서/ 2024. 11. 11. <시산맥사> 펴냄
* 이만식/ 1992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시론』『하느님의 야구장 입장권』『나는 정말 아주 다르다』『아내의 문학』『거꾸로 보는 한국문학사』『너라는 즐거운 지옥』등 6권, 문학평론집『해체론의 시대』, 번역서 잭 케루악『길 위에서』, 조너던 컬러『해체비평』등 다수, 현) 가천대 영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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