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나라의 가장 귀중한 보물
강소연/ 문화재청 전문위원
석가모니 붓다는 그의 마지막 유언으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또는 스스로 법을 밝혀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무명 속 중생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의지처를 찾아 헤맨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법에 의지하라'고 당부하였건만, 위대한 스승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에, 추모의 물결이 일어난다. 그리고 너도나도 붓다의 유골을 마치 붓다의 생신生身인 양 모시기 위해, 싸움마저 일어날 조짐이 생겨났다. 주변의 각 나라들은 붓다의 사리를 서로 가져가려고 앞다투었는데 이를 '사리 분쟁'이라고도 일컫는다.
고대 인도의 아소카왕은 붓다의 사리를 각 지역마다 나누어 8만 4천 개의 탑을 조성하는 업적을 남겼다고 전한다. 붓다의 사리를 기념하고자 하는 열망은, 아소카왕의 위대한 업적을 넘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또는 스리랑카에서 태국으로 미얀마로 인도네시아로 번파奔发*되면서 무수한 탑을 일으킨다. 즉, '붓다의 사리가 있는 곳'은 '붓다가 현존하는 곳'이라는 신앙적 의미를 갖기에, 사리의 전파에 따라 탑이 우후죽순 식으로 일어나고, 탑이 있는 곳에는 불교의 신앙이 번성하게 되었다.
'붓다의 진신 사리가 나라에 있느냐 없느냐'는, 당시 불교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중차대한 문제였기에,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건 이 '사리를 모셔오는 임무'는 고승들의 가장 막중한 임무 중의 하나였다. 목숨을 건 순례를 통해 가지고 온 진신 사리를 잘 보존하는 것은 나라의 존립과도 맞먹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선덕왕 통치 시절인 정관17년에 자장(慈藏, 590~658, 68세) 율사가 "중국의 당 나라에서 붓다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사리 1백 립 그리고 붓다가 입었던 금점의 붉은 옷 가사 한 벌을 가져와, 황룡사 · 태화탑 · 통도사 계단의 세 곳에 나누어 봉안했다"라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 외에도 의상 법사와 같은 고승 및 사신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 사리는, 대대로 '나라의 가장 중요한 보물'로 인식되었다. (p. 234-235)
* 번파 奔发: (중국어, 감정이나 생각을) 마음껏 드러내다. (네이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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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가을(78)호 <예술_'스투파-솔도파-탑파-탑'의 원리> 에서
* 강소연/ 중앙승가대학 교수(문화재학), 현) 문화재청 전문위원, 조달청 전문위원, 동국대 징계위원회 위원, 조계종 성보문화재위원, 경기도 사찰보존위원회 위원 등, 저서『사찰불화 명작강의』(불광출판), 『명화에서 길을 찾다』(시공아트), 『삶이 苦일 때, 붓다 직설과 미술』(불광출판사)등,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성균관대학 연구교수,⟪조선일보⟫ 전임기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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