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숙명이랴
정숙자
1.
10대 초. 감성도 이성도 순백이던 때. 날카로운 시의 빛에 눈을 찔렸다. 그리고는 이순에 이른 오늘 날까지 그때 멀어버린 두 눈으로 어듬더듬 한 길을 가고 있다. 시는 내 인생에서 저주이다가 축복이다가 이제는 숙명이라고 믿게끔 되었다. 숙명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숙명이니 말이다. 국적이나 부모 형제 등을 숙명의 범위로 규정하지만 움퍽짐퍽 건너온 시간을 돌아보건대 나에게 있어서 시란 국적이나 부모 형제보다도 몇 발 먼저 정해졌던 것 같다.
운명을 겪어내기도 쉽지 않거늘, 하물며 숙명이랴. 이는 필시 우주 어느 먼 곳에서부터 시가 나의 노예이거나 내가 시의 노비로 짝 지워졌기 때문이리라. 시와 내가 서로 섬기지 못하고 사나흘을 넘기면 반드시 몸살이 난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몸에 살(殺)이 붙는다는 것은! 그러고 보면 한 덩이의 몸에 두 혼이 깃들어 사는 이치다. 여중시절 학비를 대어준 오라버니는 나를 의사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뜻과 은혜를 일찌감치 저버리고 끊임없이 저주파가 흐르는 시의 계곡에 뼈를 던진 문인목이 되었으니.
2.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한다 했던가. 절망에 갇힐 때마다 나는 기적과 인연했다. 기적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금은보화이거나 용꿈이 아니라 신이 보낸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그 중 한 분이 바로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었다. 신성(神性)이 작용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 분을 인연했겠는가. 나는 그 분의 학교 제자가 아니고, 하다못해 질마재 출신도 아니었다. 다만 외로이 다만 간절히 족쇄 채워진 시의 노비로서 단 한 줄 절구를 염원하며 하루하루 노 저었을 뿐. 그런데도 미당(이하존칭생략)은 내 앞날을 수용했다.
1988년『문학정신』12월호. 지금 찬찬히 간기를 들여다보니 발행인/편집인-서정주. 주간-김윤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이 곧 나의 등단지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이 책 제27호를 끝으로『문학정신』은 타사에 양도되었다. 풋내기인 나로서는 왜 그랬는지 내막을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미당의 (영예로운) 마지막 추천자이면서 태어나자마자 모지(母紙)와는 무관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렸다. 제28호부터는 편집진도 전격 교체되어 새로운 형태의『문학정신』이 나왔다고 들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웬 일인지 폐간되었다.
3.
나는 늘 간신히 서 있는 자다. 이 세상 어디에도 기댈 구석이라곤 없다. 그것은 세상이 어째서라기보다 나 자신이 갖추지 못한 탓이다. ‘문인목’이네, ‘기적’이네 하는 어휘는 쉽사리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천신만고의 삶을 버티는 자만이 취득할 수 있는 언어다. 신은 나에게 행운을 내줬다가도 히히 히 금세 회수한다. 그렇지만 그 잠깐-잠깐의 행운이 아니었던들 나는 오늘에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간 나를 도운 기적이 어찌 미당뿐이었겠는가. 훌륭한 스승과 미덕을 베풀어준 문우, 가족들도 인내심을 보태주었다.
등단한 지 20여 년이 흘러서일까. 요새는 이따금 ‘등단기’ 원고청탁이 들어온다. 신기하게도 쓸 때마다 핵심은 똑같은데 테마는 다르다. 현재의 상황에서 기억이 재편집되는 까닭이다.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도태되지도 않는, 문인목의 이런 기적이 얼마만큼의 노력의 진행인지 저기 저 절벽의 소나무를 보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미당이 나에게 걸었던 신뢰와 기대가 무엇인지를 나는 안다. 말이란 꼭 말로 해야만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 발표해야 될 게 하나 있다. <나의 최후의 목표는 노력이다>라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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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시대』2012.11/12월(47호) '수필로 쓰는 나의 문단 등단기'에서
* 원제 : 내 안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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