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긴 빗방울들
안주철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상자 모양의 선물이에요
꺼내지 않아도 마음인지 알고요
다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혼자 웃고
또 혼자 웃으면
단란한 혼자가 되기도 합니다
창문 너머의 흐린 날씨를 방충망을 통해 보고 있어요
흐린 날씨도 방충망으로 보면 촘촘하네요
내려오는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같을 텐데
한 번 내린 비는 다른 계단으로 걷고 있는 듯해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 주워가면서
하루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제 스스로 절벽이 되는 듯해요
제가 쌓아올린 절벽에서 떨어져
이 세상에서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팔이 길어지지 않아서 밥을 차려먹지 않았어요
다리가 짧아져서 일어나는 일도 큰일이 되어버렸고요
한강을 걸어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천천히 하늘을 내려오는 생각에 갇혀있어요
밤에 팔이 조금 길어지면 창문을 닫으려고 해요
-전문(p. 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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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경계』 2024-여름(61)호 <신작시>에서
* 안주철/ 강원 원주 출생, 2002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느낌은 멈추지 않는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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