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다리가 긴 빗방울들/ 안주철

검지 정숙자 2024. 8. 22. 01:41

 

    다리가 긴 빗방울들

 

     안주철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상자 모양의 선물이에요

  꺼내지 않아도 마음인지 알고요

 

  다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혼자 웃고

  또 혼자 웃으면

  단란한 혼자가 되기도 합니다

 

  창문 너머의 흐린 날씨를 방충망을 통해 보고 있어요

  흐린 날씨도 방충망으로 보면 촘촘하네요

 

  내려오는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같을 텐데

  한 번 내린 비는 다른 계단으로 걷고 있는 듯해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 주워가면서

 

  하루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제 스스로 절벽이 되는 듯해요

 

  제가 쌓아올린 절벽에서 떨어져

  이 세상에서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팔이 길어지지 않아서 밥을 차려먹지 않았어요

  다리가 짧아져서 일어나는 일도 큰일이 되어버렸고요

 

  한강을 걸어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천천히 하늘을 내려오는 생각에 갇혀있어요

  밤에 팔이 조금 길어지면 창문을 닫으려고 해요

      -전문(p. 57-59)

  ---------------------------

  * 『시와경계』 2024-여름(61) <신작시>에서

  * 안주철/ 강원 원주 출생, 2002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느낌은 멈추지 않는다』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8/ 정숙자  (0) 2024.08.22
함부르크/ 안주철  (0) 2024.08.22
물그릇/ 길상호  (0) 2024.08.22
의자를 빌려주는/ 길상호  (0) 2024.08.22
격정의 세계/ 이서린  (0) 202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