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하린
송곳을 하루 종일 만진 적이 있어요 만지면 만질수록 찌르고 싶은 밤이 자꾸 늘어났죠
일요일엔 일요일에 적합한 슬픔이 떠올랐지요 식당 주방에서 10시간 동안 불판을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검게 눌어붙은 애인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혐오란 말이 그때 불쑥 내게 찾아왔어요 동물성 기름을 뒤집어쓴 듯 젠장, 젠장을 남발했어요 지구의 급소가 궁금해지고 한 방향 한 곳을 향해 집중하는 버릇이 생겨났어요
마약에 취한 듯한 구름이 지나갔어요 내 마음은 왜 자존심도 없이 그렇게 푹신한 걸 좋아하는 걸까요 그것이 더 화가 났어요 뭉쳐진 상상으로부터 송곳이 불쑥불쑥 솟아올랐어요
점점 더 자라고 있는 송곳을 어디에 숨겨야 할까요 머릿속에 담으면 송곳이 나를 감시하고 심장 속에 넣으면 기분을 발산해요
식당 주인이 이제 그만 나오라고 하는데, 애인이 생일 날짜를 알려 주는데 뾰족한 것들은 눈치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나를 찌르면 어떤 피가 나올까요 빨간 피를 즐까 하얀 피를 줄까 선택하라면 난 당당히 검은 피를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깊숙한 곳에 송곳을 품은 나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전문-
해설> 한 문장: 하린이 이 시집에서 구현하는 것은 서발턴과의 미적 연대이다. 시인과 서발턴은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 시스템 안의 주변인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시인은 지상에 끌려 내려온 "구름 속의 왕자"(샤를 보들레르_C. Baudelaire)이기 때문에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구름 너머 시인의 꿈은 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서발턴은 현대판 호모 사케르(Homo Sacer)이다.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 아무도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시스템은 그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이기를 원한다. 서발턴은 생존하기 위해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 정서의 구조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인 시인이 지상에서 감내하는 구조와 유사하다.
된다. (p. 시 108-109/ 론 148-149) <오민석/ 문학평론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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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기분의 탄생』에서/ 2024. 6. 21. <시인의일요일> 펴냄
* 하린/ 2008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서민생존헌장』로『1초 동안의 긴 고백』, 시 창작 연구서『시클』『49가지 시 쓰기의 상상 테마』, 평론『담화 구조적 측면에서의 친일시 연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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