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의 바통 외 1편
박은숙
몇십 바퀴의 트랙을
전력을 다해 돈 것 같은데
내 손엔 그 흔한, 건네받은 바통 하나
들려져 있지 않다
빈손을 이어벋으며 여기까지 달렸거나
바람이나 햇살 같은 무형을 쥐고
달렸다는 뜻이겠지
제각각 바통을 든 사람들과
트랙을 한참 돌다 보면
그들은 하나씩 둘씩 바람처럼 나를 제치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은 이런저런 바통을 건네다 떨어뜨려서
실격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제 것이 아닌 것 받으려 했거나
너무 꽉 쥐려고 했을 것이다
바통을 놓치면 넘겨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둘 다 실격이다
그러니 어쩌면 빈손을 넘겨주고
그 빈손을 받고 또 열심이 뛰고
그런 일이 훨씬 속 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받은 것 없으니 놓칠 일도 없다
속 편한 사람보다는
손이 편한 사람도 괜찮을 것 같다
내 손은 비어 있으니
아무나 와서 잡아도 괜찮다
-전문(p.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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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계산법
큰일은 너무 넓어서 모를 때
작은 일에 몰아넣고 보면
알맞게 보인다.
열 사람의 일은 한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그런 마음이 집단을 이루고 대표를 뽑는 일을 발명했다.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몇 날 며칠을 주고받아도 모를 말의 이면들은 슬쩍, 떠보는 의사 타진으로 알 수 있다.
오전에 설문조사를 묻는 전화가 왔었다. 꽤 여러 개의 항목 중에 어느 쪽에 서 있냐고 물을 때 나는 지금 내리는 비의 밖에 서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누구의 비유였을까. 잘 접힌다고 하는 사람도 잘 펴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계산하는 친구도 간혹 있었다.
-전문(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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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나는 누구의 비유였을까』에서/ 2024. 5. 30. <문학의전당> 펴냄
* 박은숙/ 충북 중원 출생, 2021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수필집『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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