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햇살의 노래
지연희/ 시인 · 수필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는 생명의 씨앗들이 흙에 묻혀 움츠린 몸을 조금씩 가다듬어 대지를 뚫고 빛의 세상에 솟아오르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지난한 용기와 결단을 세워보지만 가느다란 숨쉬기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철옹성 같은 단단한 마른땅을 딛고 오르는 결사의 힘을 키우기 위해 생명의 씨앗들은 손톱 끝으로 땅을 파고 어둠의 늪에서 탈출하려 한다. 내 몸 안 깊이 존귀한 생명을 부여해 준 어버이가 걸었던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헤쳐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햇살의 살결이 곱다. 따사롭고 온유하다. 아니 눈부시기까지 한 햇살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떠 본다. 가슴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스며드는 느낌이다. 손끝에 닿는 햇살의 온도가 밤새 몸을 담았던 이불 속 온기처럼 훈훈하다. 손등에 올리어진 빛의 내력을 더듬거린다. 저 뜨거운 숨으로 돋아 오르는 생명의 힘은 머지않아 파릇파릇 고개를 치켜들고 대지의 표피를 열어 낼 것이다. 꿈을 키우기 위한 무한한 욕망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손을 뻗고 있다. 한 포기의 순筍, 햇살이 조금씩 키를 세워 집을 짓고 있다.
아직은 피할 수 없는 한기를 붙들고 조심조심 일어서는 여린 잎들의 몸짓이 사랑스럽다. 성큼성큼 다가온 햇살이 차가운 바람에 물든 키 작은 어린 냉이의 부러진 손가락을 따뜻하게 품어 안는다. 누군가의 손길로 누군가의 온정으로 도닥여 주는 배려가 아름답다. 파릇하게 햇살을 머금은 순筍들이 거울 빛처럼 빛나고 있다. 사실은 이 한 포기의 생명은 지난겨울의 어느 날 가로수 밑에 기대어 한기를 참으며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행인의 발길에 밟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리고 가엾은 그는 어김없이 달려온 햇살의 지극한 정성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몰아치는 깊은 풍랑을 딛고 와 일어서고 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상처의 아픔을 딛고 초연히 지상에 오른 거룩한 생명들의 춤사위가 아름답다. 세상 어둠을 지우는 사명을 부여받은 햇살은 언제 어디서건 숨이 고장 난 풀잎들에게 달려오고 있다. 파릇하게 순筍을 키우는 절망을 딛고 일어선 한 포기의 냉이도 햇살을 머금고 봄날의 향연에 초대받을 것이다. 온몸 가득했던 상처를 치유하던 햇살의 간절한 기도의 공력이다. 한낮이 저물고 서녘에 서서 남은 햇살을 소진하고 있는 앞집 건물 벽에 기댄 그림자를 바라본다. ▩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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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문학광장』 2024-2월(2)호 <꽃이 전하는 말 · 2 > 에서
* 지연희/ 1982년『한국수필』로 & 1983년『월간문학』수필 부문 & 2003년『시문학』 으로 시 부문 등단, 수필집『식탁 위 사과 한 알의 낯빛이 저리 붉다』외 16권, 시집『메신저』『그럼에도 좋은 날 나무가 웃고 있다』외, 작품론『현대시 작품론』『현대수필 작품론 』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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