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오탁번(1943-2023, 80세)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 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전문- (p. 110-112)
▶'원서헌'에서 오탁번 시인을 만나다(발췌) _이정현/ 시인
"나의 시를 쉽게, 재미있게 읽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시를 쓸 때 엄청 공을 들이는 편이에요."라고. "낭모칸천 낭모칸천/ 목 쉰 목탁/ 두드리며/ 오시게나" (「낭모칸천」) 탁번이의 방울 탁鐸처럼 목탁을 두드리며 오는 시인의 겨울은 이제 춥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쓸쓸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젠 마늘 심고 캐는 '앉음앉음'이 드높은 눈 밝은 이다.
(···)
신춘문예 3종 3연패! 1966년에 동화, 1967년에 시, 1969년에 소설이 당선되어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시인은 그것이 멍에였다고 한다. 밤이 하얘지도록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데 그 '노동'이 '재주'로 둔갑하는 묘妙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요즘 소설을 안 쓴 지 몇십 년이 흘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소설은 노동보다 더한 하늘이 내린 형벌이에요."란다. 그만큼 어깨도 아프고 육체적으로 힘들어 소설을 계속 쓰다가는 죽을 거 같아, 시인은 다시 시로 돌아왔다. 시는 시원하다 했다. 마치 일하다가 마시는 냉수 한 사발보다 더······!
시인은 1997년 시 「백두산 천지」로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총3연으로 된 긴 산문시인데 먼먼 훗날 시인의 '대표시'가 「백두산 천지」일 거라 말하는 시인은 "죽기 전에 이 나라에 남길 시를 쓰고 싶었어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이 시가 교과서 1페이지에 실릴 상상을 해요." 한다. 나도 덩달아서 신이 나 다시 한번 「백두산 천지」를 읽어보았다. 미래의 어느 날 백두산 천지에 오탁번 시비를 세운다. 한국 사람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사람들이 시비를 향해 큰절 올리는 장면을 상상한다고 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통일이 어서 올 것만 같다. (p. 시 404-406/ 론 404 (···) 406)
-----------------
* 오탁번 시 읽기 2 『좋은 시는 다 우스개다』에서/ 2024. 1. 25. <태학사> 펴냄
* 이정현/ 시인, 강원 횡성 출생, 『문학과창작』편집자 역임, 현) 『월간문학』 편집위원, 시집『살아가는 즐거움』『춤명상』『풀다』, 시선집『라캉의 여자』, 평론집『60년대 시인 깊이 읽기』등
'비평집 속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 진열은 사열이다 : 김송포 (2) | 2024.03.24 |
---|---|
오태환_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부분)/ 저녁연기 : 오탁번 (0) | 2024.03.13 |
못/ 김광선 (0) | 2024.01.18 |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구름 농사 : 유재영 (0) | 2024.01.17 |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나비가 날아간 깊이 : 이진희 (0) | 2024.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