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블루마블
이혜미
마주앉아 주사위를 던지던 밤, 우리는 비에 젖은 도시들을 하나둘 쓸어 모으기 시작했네 힘없이 손끝에서 녹아내리던 이국의 골목들, 온통 여관과 호텔뿐인 도시들 속에서 우리는 좀 더 비릿한 곳을 찾아 위조지폐처럼 떠돌았지
너에게로 떠난다는 것은 한 바퀴 돌아와 다시 제자리에 쓰러진다는 말, 도시의 행간에 몸을 누이면 성난 빌딩들이 서늘한 몸을 포개왔네 누군가 키운 파산을 먹고 자라나는 도시, 한 칸 그림자를 엎질러놓을 곳이 없어 우리는 흘러내리고 아무리 주사위를 던져도 도시는 내 것이 아니었어 도시의 이름들은 생에서 꼭 투병해야 할 병명일 뿐, 주사위의 수를 따라 앞다투어 자리를 바꾸던 별들이 유목의 좌표를 일러주었네
이 밤을 구르던 거대한 주사위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흐르는 비와 혀를 섞다 보면 어느새 당도해 있는 서계의 끝, 서울
-(전문), 시집 『보라의 바깥』 p. 68_(창비. 2011)
▶닻과 같은 사람(발췌) _이현호/ 시인
이혜미 시인이 내게 준 시집들을 오랜만에 다시 들춰봤다. 면지에 사인하며 부른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 재밌다. 첫 시집에서는 '이현호 님', 두 번째 시집에서는 '오랜 친구 이현호 선생', 세 번째 시집에는 '15년 지기 문우 이현호 시인'이라고 적혀 있다. 최근 시집인 『흉터 쿠키』(현대문학, 2022)에서는 나를 무어라고 불렀는지 알 길이 없다. 우편으로 시집을 받기는 받았는데, 면지에 다른 시인의 이름을 적은 것이 잘못 왔다. 누군가는 내 이름이 적힌 시집을 받고 잠시 당황했을 테다.
그와 다른 일로 통화할 때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그냥 껄껄 웃기만 했다. 그래서 나도 그만 껄껄 웃고 말았다. 그는 부지런한 시인이라 등단한 이래 이제껏 5년을 주기로 꼬박꼬박 시집을 출간했다. 작년에는 소시집 격인 『흉터 쿠키』와 에세이집 『식탁 위의 고백들』을 연달아 냈다. 그의 성실함을 보건대 몇 년 있으면 어김없이 새 시집을 펴낼 테니, 나를 또 뭐라고 부르는지는 그때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는 차기작을 믿고 기다려도 좋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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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을 적은 면지를 살피면서 그의 시집을 일별하다 보니 시 한 편이 유독 눈에 꽂힌다. 알다시피 '블루마블(Blue Marble)'은 가짜 돈으로 가짜 땅을 사는 보드게임이다. 그 속에서 진짜는 우리가 던지는 주사위의 눈뿐이다. 이런 생각으로 「빗속의 블루마블」을 다시 보니 의미가 새롭다. 나는 이 시에서 '주사위'를 '시'로 바꿔 읽는다. 그러면 주사위가 나오는 구절들은 이렇게 읽힌다. "마주앉아 시를 쓰던 밤", "아무리 써도 도시는 내 것이 아니었어", "시를 따라 앞다투어 자리를 바꾸던 별들이 유목의 좌표를 일러주었네, "이 밤을 구르던 거대한 시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흐르는 비와 혀를 섞다보면 어느새 당도해 있는 세계의 끝". 나의 오독에 따르면 「빗속의 블루마블」은 이혜미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써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p. 시 137-138/ 론 137 *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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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7월(403)호 <커버스토리_이혜미> 에서
* 이혜미/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으로 등단, 시집『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빛의 자격을 얻어』『흉터 쿠키』
* 이현호/ 2007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라이터 좀 빌립시다』『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비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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