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외 1편
장유정
플라타너스가 발끝을 세워 자세를 잡고 있다
발뒤꿈치를 살짝살짝 들고 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비상
토슈즈 속에 감추어진 요정처럼 빛나는 다른 한편으로
굳은살로 뒤범벅되어 기형으로 변한 발
발바닥 멈추기처럼 발동작 하나하나
모든 작품에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
어찌 그리 우아하고 가벼워질 수 있을까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거친 발이 이슈다
생의 무대 위에서 줄곧 조연
어떤 목표를 가져 본 적도
경쟁을 생각한 적도 없다는 사실
몇천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심지어 발가락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붕대로 감고 슬럼프는 친구라며 진통제를 삼킨다
늘 어딘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게으름의 회복기가 길어진다고
마디가 툭툭 불거져
하마터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뻔
노란 수액 몇 개씩 꽂는 것은 예사롭다는 듯이
군무로부터 하프 솔로 솔로 마돈나의 자세로 발가락을 움츠렸다
바람의 무게까지 까치발로 번진다고 믿게 되는 오후
나무의 꿈은 어떤 각오같이 불안한 가운데 새들의 날개 위에 실리곤 했다
고마워요, 행복했어요, 커튼콜의 스포트라이트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올해의 플라타너스가 맨발로 다른 동작을 보여 주고 있다
-전문(p.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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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독 木牘
숲 안쪽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무에 붙어 있다
날카로운 부리가 들어 있는 소리
소리는 점점 둥근 모양으로 변한다
둥근 구멍을 내는 소리의 모양을 보고 들었다
나무의 한쪽을 헐어 내는 작업
가지마다 돋아나는 획 같은 나뭇잎들이 떨린다
긴 부리를 넣고 다니는 날개의 공구 통
그늘 천막이 펼쳐 놓은 나무 둘레에
흰 목질의 파편이 쌓여 간다
지금 느티나무의 서각이 한창이다
나무 한 그루에서 둔탁한 소리들을 다 빼내고 나면
그 자리에 부드러운 둥지가 들어설 것이다
공명으로 파 놓은 둥근 집
서각은 나무의 공명만 남겨 놓고 옆의 표면을 긁어내는 일이다
훗날 나무에 귀를 대면 털 없는 허기가 들릴 것이고
더 훗날 새끼들 다 날아가면
구겨지지 않는 흰 목질에 조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
나뭇조각들이 낙하할 것이다
부리로 새긴 목독木牘
저 소리 다 그치면 글자들은 조용한 페이지를 얻는다
딱딱거리는 비문
나무의 목덜미에는 흰색의 눈썹 무늬의 문양이
고여 있는 바람의 소리로 새겨져 있다
-전문(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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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저녁이라 불러서는 안 돼요』에서/ 2024. 1. 12. <시작> 펴냄
* 장유정/ 201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그늘이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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