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의 카나리아
정한용
1
옛날, 석탄을 캐는 갱도 막장에서는 언제 가스가 새어 나와 폭발할지 몰라, 공기 변화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함께 데리고 갔다고 한다. 예민한 카나리아가 숨 막혀 죽으면, 그제야 광부들은 눈치를 채고 재빨리 막장을 빠져나오곤 했다. 새는 죽으면서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일러주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슬퍼했을까.
2
카나리아 제도는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흩어져 있는 7개의 섬. 가장 가까운 섬이 모로코 해안에서 100㎞나 떨어져 있고, 가장 큰 섬인 테네리페에는 만년설을 뒤집어 쓴 거대한 활화산이 있다. 스페인 속령으로, 현재 17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지금은 일 년에 천만 명이나 찾아가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휴양지가 되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외롭고 가난한 섬에 불과했다. 카나리아만이 쓸쓸히 울고 있었다.
이 섬에는 수천 년 전부터 관체족이 살았다. 이 종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초기 정복자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흰 피부에 푸른 눈, 금발에 체격이 건장하며 호전적이었다. 그래서 크로마뇽인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또 몇 개 남은 언어가 아프리카 북부의 베르베르어와 아주 비슷해,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나갔다 고립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대륙과 떨어져, 카나리아와 함께 평안히 살았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들은 섬사람이면서도 항해술이 미숙해, 육지는커녕 먼 바다조차 나가질 않았다.
3
1400년대부터 유럽이 신대륙으로 팽창을 시작하자, 이 섬은 여러 나라의 먹잇감이 되기에 딱 좋았다. 당시 관체족 인구는 8만 명, 양가죽이나 골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장식 없는 질그릇을 사용했다. 그들은 겨우 석기시대에 살고 있어, 무기라는 게 고작 '마기도'라는 목검과 '타보나'라는 석검이 전부였다. 1402년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쟁하듯 이 섬으로 몰려가, 낚시하듯 하나씩 하나씩 섬을 삼켰다.
관체족은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나무칼 돌칼로 유럽의 대포와 기마병과 맞섰다. 무기로는 맞수가 안 되자 게릴라전으로 버텼다. 수십 년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483년 600명의 군사와 1,500명의 노약자가 두 손 들고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구석에 숨어 끝까지 버티던 원주민들은 모두 죽었다. 그런데, 스페인의 무력은 사실 말이나 대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육지와 오래 격리되어 살던 원주민들에겐 면역력이 없었다. 그들은 내지 사람들의 전염병인 '모도라'에 걸려 죽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494년, 테네리페 해안에 페르난데즈가 나무 십자가를 꽂음으로써 카나리아는 스페인 땅이 되었다.
끝까지 버틴 수천 명도 결국은 같은 운명이었다. 병을 이긴 관체족들은 진짜 정복의 희생물이 되었다. 땅을 빼앗기고, 집도 불탔다. 언어가 사라지고, 나라가 사라지고, 자식도 아내도 모두 사라졌다. 모도라는 몇 차례 반복되었고, 이질, 폐렴, 성병이 창궐했다. 카나리아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50년 뒤······ 지롤라모 벤조니가 섬을 찾아갔을 때, 거기엔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술에 찌들어 눈이 벌게진 81세의 노인이었다. 한 때 섬의 주인이었던 관체족은 멸종한 것이다.
4
싸울 사람도 없고
두려워할 사람도 없소
모두 죽었소
숲은 불타고 숲의 정령들도 모두 떠났소
카나리아 새들도 노래를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졌소
술이나 한잔 더 따르시오
우리 피맺힌 울음이 흰 산을 움직여 터져 나올 때
내 경고를 기억하시오
바다가 뒤집히고
파도가 당신들을 쓸어갈 것이니
우린 다시 살 것이니
-전문(p. 88-91)// 『다층』 2008-여름(38)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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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시-100> 에서
* 정한용/ 1980년 ⟪중앙일보⟫ 평론 당선, 시집『유령들』『나나 이야기』『천년 동안 내리는 비』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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