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먼지화엄경/ 강영은

검지 정숙자 2024. 1. 10. 02:27

 

    먼지화엄경

 

     강영은

 

 

  섣달 그믐날, 총체를 들고 먼지를 턴다.

 

  하나로 묶인 말꼬리 속,

 

  유리창의 투명 얼굴이 털려나가고 책갈피의 자음과 모음이 털려 나가고 피아노의 흑백 계단이 털려 나가고 커튼 자락 주름 잡힌 고뇌가 털려 나가고 냉장고 위 두껍게 쌓인 침묵이 털려 나간다.

 

  햇빛 속, 보이지 않던 세상이 화엄을 이룬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먼지화엄경을 다시 읽는다.

 

  나를 이루고 있는 접속사와 감탄 부호, 수납장 속의 바퀴벌레처럼 먼지로 남아 있는 모든 것, 내가 이름 지은 거머리별과 이름을 갖고 싶어 하는 뭇별들, 진화 중인 먼지까지 모조리 품고 있는 비로나자불의 구름바다 속,

 

  나는 총체적인 먼지다

    -전문(p. 107)// 『다층』 2009-봄(24)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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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100> 에서

  * 강영은/ 2000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녹색비단구렁이』『상양한 시론詩論』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