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실거리나무꽃이 피고 있다/ 변종태

검지 정숙자 2024. 1. 6. 15:02

 

    실거리나무꽃이 피고 있다

 

     변종태

 

 

              1

  오월에는 벽이 자란다.

  벽이 벽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고,

  벽이 벽과 함께 흐르는 오월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벽이 벽에 기대서서 저들끼리 사유의 도랑을 낸다.

 

              2

  세월의 흐름은 제자리를 맴도는데,

  안개가 낮게 깔린 뒷골목에서

  실거리나무가 노오란 웃음을 흘리며 지퍼를 내리고 있다.

 

              3

  바람이 불고 있다. 노오란 바람이 실거리나무를 스쳐와 안개꽃을 흔들고 있다.

  시간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다.

  그리움은 절대로 한 쌍의 무리를 짓는 일이 없다.

  보도 블록 사이에서 잡초가 자라고, 서러움이 자라고, 아픔이 자란다.

 

              4

  이대로 머물 수는 없다.

 

  이대로 떠날 수도 없다.

 

  오월에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죄가 되는데

 

  모두가 떠나버린 빈 들판

 

  노오란 실거리꽃이 피고 있다.

    -전문(p. 24-25)// 『다층』 1999년 가을(3)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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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100> 에서

  * 변종태/ 1991년『다층』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목련 봉오리로 쓰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