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지아 멜링꼴리아
전희진
프리지아를 사들고 오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꽃이 담긴 마켓봉지가 가벼웠어요
문득 꽃이 왜 가벼울까 풍선도 아닌데
그런 아득한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들은 그래서 병문안 갈 때 꽃을 사가는 것일까요? 가벼이 떨쳐내라고?
무거운 꽃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 따라나설 생각입니다
따라가서 발목에 샌드백처럼
내 양쪽 발에 노랗게 피어난 꽃을 달고 마음껏 달려보고 싶습니다
자꾸 가벼워지는 마음을
닻으로 가라앉히고 싶습니다 지금은 강변을 걷겠습니다
꽃을 보고도 꽃을 흔들며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을 보고 있는 나를
고양이가 가게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아요
눈에 뵈지 않는 고양이를 지울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고양이가 여기저기
똥을 싼다고 마시레야가 울상입니다
가지고 있던 걸 도난당하면 가벼워질까요?
대규모 폭동, 약탈에 관한 긴박한 뉴스가 있어도
나는 털리지 않아요 털리는 집들은 털릴 만하니까요
이 집 털리고 나면 저 집이 털릴 테고 나는 빈 집이니 누가 와서 내 마음
을 송두리째 털겠어요?
활자 너머 산을 가문비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터무니 있는 마음일까요
지금은 이대로 강변을 걷겠습니다
-전문(p. 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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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문학』 2023-겨울(5)호 <해외신작특집> 에서
* 전희진/ 2011년『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로사네 집의 내력』『우울과 달빛과 나란히 눕다』『나는 낯선 풍경 속으로 밀려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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