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관(觀), 시(視), 찰(察)/ 엄세원

검지 정숙자 2023. 12. 31. 02:03

 

    , 시, 찰

 

     엄세원

 

 

  부릅뜬 홍채를 스쳐 가며 비춰보는 등대

  관의 번짐이다

  어쩌면 사내의 몽환인지도

 

  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의 물결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솟아 있는 바위는 시

  어쩌면 사내의 내세인지도

 

  머리카락이 파도에 흐물거리면

  뒤이어 포말이 핥는다

  모래 알갱이들 입과 귀와 코를 드나든다

  밀물에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 덜그럭 조가비가 끼어온다

 

  홀연 파도 머리에서 수색해 오는 바람,

  큰 물결 겹겹 헤아리면서 백사장을 당겨온다

  한때 몸부림쳤을 흔적을 어깨가 끌어안고 있다

 

  맨발을 헹구는 몇 가닥의 수초, 푸르뎅뎅한 발가락을 가려준다

 

  죽음은 둥글다 둥긂,

  몸을 떠나 다시 둥긂으로 박동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박혀 있는 닻이 찰이다 

  제 모서리를 버리며 마모되는 필연

 

  짤랑거리는 동백잎들, 청보랏빛 새벽을 떠다닌다

 

  붉은 점 하나가 내려왔다

  공중 가르며 울컥 빛줄기를 게워낸다

  찢어진 틈 속 우둘투둘한 뒷등 위로

  뚜뚜뚜 뚜 뚜 뚜 뚜뚜뚜

  일제히 별들의 일상이 시작된다

 

  여기 좀 비춰봐, 플래시가 내 동공을 조이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관'과 '시' '찰'은 모두 우리말 '보다'로 번역되는 한자어다. 하지만 이 셋은 서로 차원이 다른 '보기'이다. 시인은 이 셋을 구분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관은 우리의 홍채를 뚫고 들어오는 빛의 번짐이거나 몽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강요하는 상투적 인식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체로 이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어두움을 걷어낼 때 "시"가 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파도의 동작과 그것의 선후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대상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관여하는 시간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사실주의적 시각을 의미한다. 관념을 지우고 대상의 세부에 경험적으로 육박해 들어가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찰'은 좀 더 정밀한 보기를 통해 가능하다. 그것은 대상의 내부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시선이며, 그것은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들여다보는 지혜의 눈이다. 이 눈을 갖기 위해 우리는 뻘 속에 박혀 있는 닻처럼 "제 모서리를 버리며 마모되는" 어떤 필연적인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엄세원 시인은 이 사명감으로 "플래시가 내 동공을 조이"는 고통을 감내하며 세상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뚜뚜뚜 뚜 뚜 뚜 뚜뚜뚜" 고동을 울리며 세상의 진실이 "일제히 별들"처럼 반짝이게 된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눈이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을 만들어 온 관념과 사고체계와 사회적 관습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시각이라 착각한다. (p. 시 30-31/ 론 130-131) (황정산/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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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에서/ 2023. 12. 20. <상상인> 펴냄

  * 엄세원/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숨, 들고나는 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