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觀, 시視, 찰察
엄세원
부릅뜬 홍채를 스쳐 가며 비춰보는 등대
관觀의 번짐이다
어쩌면 사내의 몽환인지도
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의 물결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솟아 있는 바위는 시視다
어쩌면 사내의 내세인지도
머리카락이 파도에 흐물거리면
뒤이어 포말이 핥는다
모래 알갱이들 입과 귀와 코를 드나든다
밀물에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 덜그럭 조가비가 끼어온다
홀연 파도 머리에서 수색해 오는 바람,
큰 물결 겹겹 헤아리면서 백사장을 당겨온다
한때 몸부림쳤을 흔적을 어깨가 끌어안고 있다
맨발을 헹구는 몇 가닥의 수초, 푸르뎅뎅한 발가락을 가려준다
죽음은 둥글다 둥긂,
몸을 떠나 다시 둥긂으로 박동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박혀 있는 닻이 찰察이다
제 모서리를 버리며 마모되는 필연
짤랑거리는 동백잎들, 청보랏빛 새벽을 떠다닌다
붉은 점 하나가 내려왔다
공중 가르며 울컥 빛줄기를 게워낸다
찢어진 틈 속 우둘투둘한 뒷등 위로
뚜뚜뚜 뚜 뚜 뚜 뚜뚜뚜
일제히 별들의 일상이 시작된다
여기 좀 비춰봐, 플래시가 내 동공을 조이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관觀'과 '시視' '찰察'은 모두 우리말 '보다'로 번역되는 한자어다. 하지만 이 셋은 서로 차원이 다른 '보기'이다. 시인은 이 셋을 구분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관은 우리의 홍채를 뚫고 들어오는 빛의 번짐이거나 몽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강요하는 상투적 인식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체로 이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어두움을 걷어낼 때 "시視"가 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파도의 동작과 그것의 선후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대상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관여하는 시간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사실주의적 시각을 의미한다. 관념을 지우고 대상의 세부에 경험적으로 육박해 들어가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찰察'은 좀 더 정밀한 보기를 통해 가능하다. 그것은 대상의 내부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시선이며, 그것은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들여다보는 지혜의 눈이다. 이 눈을 갖기 위해 우리는 뻘 속에 박혀 있는 닻처럼 "제 모서리를 버리며 마모되는" 어떤 필연적인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엄세원 시인은 이 사명감으로 "플래시가 내 동공을 조이"는 고통을 감내하며 세상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뚜뚜뚜 뚜 뚜 뚜 뚜뚜뚜" 고동을 울리며 세상의 진실이 "일제히 별들"처럼 반짝이게 된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눈이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을 만들어 온 관념과 사고체계와 사회적 관습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시각이라 착각한다. (p. 시 30-31/ 론 130-131) (황정산/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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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에서/ 2023. 12. 20. <상상인> 펴냄
* 엄세원/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숨, 들고나는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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