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허블 씨, 은퇴를 앞두다 외 1편/ 김성진

검지 정숙자 2023. 12. 22. 02:15

 

    허블 씨, 은퇴를 앞두다 외 1편

 

     김성진

 

 

  대기권 저 너머 세상을 읽는다고 했어

  빛의 왜곡을 벗어나는 것은 편견을 버리는 일

  그의 나이 서른세 살, 예측보다 두 배나 살았지

  간혹 관절염이나 백내장 따위의 노인성 질환을 앓기도 해

  읽는다는 것은 닳는다는 법칙이 있는 거야

  차라리 읽지 말아야 했어

  얼마 전 또다시 시력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흐린 각막을 걷어내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거야

  그래, 다시 눈을 뜨긴 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에게 휴식을 주어야 해

  짐작건대 그의 은퇴가 가까워지고 있어

  결코 나이 때문만은 아니야

  더 멀리 보기엔 그의 시야는 한정되어 있어

  세상은 정체를 원하지 않아

  마침 반기운 소식이 들려와

  그를 능가하는 후임자가 온 거야

  그의 이름은 제임스 웹이라고 해

  더 먼 세상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거야

      -전문(p.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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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윤회

 

 

  땅 위에 유배되어 있을 때였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상상을 했지

  밤이 별의 배경이듯,

  하늘은 산천의 배경인 것을 보았어

  나도 다른 무엇의 배경이 되고 싶었던 거지

  끝없이 날아도 발바닥은 지상에 그대로 있어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어

  땅에도 바람이 부는 걸까

  구름이 솟아올라 발을 적시게 했어

  바닥에도 하늘이 있었던 게지

  하늘과 땅은 동색이었어

  날개를 펼치지 않던 새가 날아올랐어

  비어 있는 퍼즐 공간에 계절을 채워 넣은 거야

  아름다웠지만, 정답은 아니라고 말했지

  대기를 뚫고 더 높은 우주를 향해 날고 싶었어

  늘 가까이 맞닿아 있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어

  날고 있는 새만 이방인이었어

  하늘을 압축할 수 있었던 거야

  풍선처럼 터졌어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필요하지 않아

  공간을 지우고 있는 중이야

      -전문(p.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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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에스프레소』 에서/ 2023. 11. 6. <실천> 펴냄

  * 김성진2016년 『시와사상』으로 시 부문 & 2015년 『에세이문학』으로 수필 부문 등단, 시집『억울한 봄』, 수필집『그는 이메탈을 닮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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