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한 외 2편
하기정
세계는 점점 연출될 것이다
스크린과 휴대폰의 액정 안에서
허구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대본은 더 잘 읽힐 것이다
예견된 대화를 주고받고
끝날 때까지 예정된 시간을 견딜 것이다
수정 가능한 계획은 없고
갈등은 여전히 재구성될 것이다
카메라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주연이 될 것이다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그럴듯하게 연루된 사건은 패턴을 반복하고
리턴과 유턴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뻔한 장면에서 연인들은 서둘러 키스를 퍼붓고
반전은 연장전처럼 지루할 것이다
출연자는 늘고 관객은 모자랄 것이다
예정된 시간에 태어나 예정된 시간에 종료될 것이다
홍수가 일어날 것이다
사전은 찢기어 글자들이 지워질 것이다
대본은 다시 쓰여지고
누구나 알고 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2부가 시작될 것이다
-전문(p.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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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열쇠를 잃어버렸다 없는 사람을 업고 열쇠를 찾고 있었다 바위의 말문을 여는, 모과의 과즙을 흘리게 하는 열쇠였다 비밀 가득한 과학실험실의 문을 따는 열쇠였다 시의 첫 문장을 딛는 열쇠였다 백 년 동안 갇힌 광부의 갱도를 뚫는 열쇠였다 백 년 만에 찾은 사람 앞에서 심장을 움켜쥐는 열쇠였다
열쇠를 찾아 세계 끝까지 다 돌고 나니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렸다 털썩 주저앉아 윗도리 주머니 속에서 발견한 열쇠였다 찾고 나니 열어야 할 문이 없는 열쇠였다 없는 사람을 업은 사람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제 다 왔군, 여기가 바로 연옥이라오."
-전문(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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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그늘을 깊게 파는 사람을 알고 있다
거푸집에 누워 왼손바닥을 찍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는 도끼로 계단을 내고 나무에 오르는 일을 경멸했다
기름을 바르고 처참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일에 열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늘 미안해서
안녕이 없는 사람
그리하여 그는 돈을 받지 않고도
아름답고 처절하게 잘도 팔았다
무엇을? 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그는 매일 밤 요령부득으로 짠 스웨터를 입고
터진 옆구리를 꿰맸다
요령이 방울 소리를 내며
실패꾸러미를 안고 왔다
꽃병을 응시하다 정물의 배경이 되는 조연들은
필사적으로 필사하는 일이 파국으로 치닫도록
코너로 몰고 가는 중이었다
여전히 지하에서 촉수를 기르는 사람
아직도 제 눈을 찌르고 있는 사람
화살이 일제히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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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회 선경문학상 수상시집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에서/ 2023. 11. 25. <상상인> 펴냄
* 하기정/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고양이와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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