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을 추억함
안영희
대형마트 문구코너에서
전혀 작정한 적 없는 공책 한 권을 사 담은 건
또 누구 짓이었담?
고딕식 교회와 적포도주빛 지붕들의 표지
표백 안 한 호밀빵 빛깔의 속지들···, 켜켜한 시간의 질감
숙직실 무쇠솥에 죽처럼 끓인 구호품 우유,
본량국민학교 6학년 아이는 전교생 앞에 불려나가
상을 받았네
난생처음 맡아본 황홀한 이국의 향내!
눈 시린 담홍색 필통에 든 연필에서도, 지우개에서도
두꺼운 두 권의 공책 표지에는
보기만 해도 눈물 고이게 행복해 뵈는,
색종이빛 지붕의 집들
겹겹 에워싼 애들이 그랬네 야야 그게다 미제야! 미제!
전쟁이 찢어 패대기친 어린 가지 툰드라에
홀연 켜진 요술램프!
열세 살의 소공녀* 걸어 나와, 또다시
오늘 또다시 공책을 사 담았네
-전문-
* 1988년 미국의 여류 소설가 버넷의 소녀소설 제목이며 주인공 이름.
해설> 한 문장: 시인은 대형마트 문구코너에서 느닷없이 "전혀 작정한 적 없는 공책 한 권"을 사 담았다. "누구 짓"이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그 해답은 이미 시의 제목에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그것은 '추억'의 힘 때문이었다. "고딕식 교회와 적포도주빛 지붕들의 표지/ 표백 안 한 호밀빵 빛깔의 속지들"을 갖춘 공책은 시인으로 하여금 켜켜한 시간의 질감을 감동적으로 재현하게끔 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전 "본량국민학교 6학년 아이"의 것이 오랜 시간을 격隔하여 다시 나타난 감동이었다. 전교생 앞에 불려나가 받았던 상들 속에 공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구호품 우유도 기억에 생생하게 "난생처음 맡아본 황홀한 이국의 향내!"로 남아 있지만, 훗날 시를 쓰게 될 그 아이의 눈에는 담홍색 필통에 든 연필이나 지우개 그리고 "두꺼운 두 권의 공책 표지"가 가장 눈물 어린 행복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보기만 해도 눈물 고이게 행복해" 보이던, "색종이빛 지붕의 집들"을 표지로 한 미제 공책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추억의 질긴 힘으로 남아 시인으로 하여금 "열세 살의 소공녀"가 되어 공책을 사 담게 한 것이다 그렇게 홀연히 켜진 시간의 요술램프야말로 안영희 시인이 써가는 '시詩'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p. 시 100-101/ 론 120-121) (유성호/ 문학평론가 ·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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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다』 에서/ 2023. 10. 31. <서정시학> 펴냄
* 안영희/ 1990년 시집『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물빛창』『그늘을 사는 법』『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내 마음의 습지』『어쩌자고 제비꽃』, 시선집『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 산문집『슬픔이 익다』, 도예 개인전 <흙과 불로 빚은 詩 (2005년, 경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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