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
최세라
긴 장마가 시작되고 있는데
나는 담장에 등을 기댄 채 버려진 물건의 설명서를 읽는다
눈이 내리면 좋겠다
푹푹 꺼지는 발자국을 따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어제 일을 잃었는데
다시 그런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같은
시리얼 상자의 성분 분석표 위에서 장마가 시작되고 있다
날씨가 나빠지는 날엔 자기소개서 뭉치를 내다버렸다 종이는 종이대로 모으고 오른손이 비닐처럼 구겨지는 날에는 왼손을 버리고 인쇄된 글자들은 먹구름이 수거해 갔다 버려진 왼손이 종이처럼 젖었다
날씨가 좋아지면
산책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시집을 사야겠다
낡은 타이어 자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문(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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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신작시> 에서
* 최세라/ 2011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복화술사의 거리』『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콜센터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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