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배홍배_산문집『내 마음의 하모니카』/ 잘 가게, 친구

검지 정숙자 2023. 10. 23. 01:02

<에세이 한 편>

 

    잘 가게, 친구

 

     배홍배

 

 

  유명인들이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이나 글을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경우를 종종 본다. 가수 배호가 '마지막 잎새'를 부르다 갔고, 차중락이 그랬고 김정호가 그렇게 갔다. 김충규 시인은 '장례식'을 쓰고 갔다. 그 죽음이 고인들 스스로 예견한 일이었거나, 아니었거나 관계없이 일반 사람들에겐 일종의 신화 같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화는 밝은 것이 아닌 어슴푸레한 빛의 배경을 갖는다. 김충규 시인의 얼굴빛은 늘 어두웠고 그가 바라보는 것들은 더 어둡게 그늘졌다. 그의 눈빛에 바랜 것들은 하이포그램적 어둠의 완성이었다. 그의 죽음이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수록, 그의 빈자리가 터무니없을수록 그의 어둠은 그가 떠난 새벽보다 투명해졌다. 그의 죽음은 생물학적 소멸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 특히 우리 같은 문인들에겐 넘어야 할 미메시스이기 때문이다. 

 

  김충규 시인과 나는 가까이 살면서 종종 만났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였지만 오랜 친구 같아서 '충규 형'이라 불렀다. 함께 있으면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둠에 나의 엷은 그림자는 빛을 잃고 광명 속으로 추방당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와 내가 속한 사회의 친숙성을 나 혼자 배반하는 것 같아 어떤 보상심리에서 그렇게 호칭했을 것이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시냇물 같은 그의 목소리에 나의 탁한 세상이 한 번 더 정류되던 그 하루 뒷날 아침 갑작스러운 그의 부음이 들렸다. 몇 번이고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귓가에 맴돌던 그의 물기 젖은 목소리는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평소 잘 듣지 않던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을 듣고 있었다. 예감은 우연의 시간 밖에서 서성이는 친구의 영혼이 두드리는 박자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닮은 면이 있었다. 둘 다 젊은 시절에 심한 폐결핵을 앓았다는 것과 현재도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도 관심사도 서로 비슷했다. 그의 시에는 '피'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물론 내가 쓴 시에도 '피'가 들어가는 구절이 더러 있지만 그만큼 처절하지는 않다. 그의 피는 몸 안에서 비린 물결로 흘렀다. 비리지 않으면 스스로 몸을 말려 더 비린 냄새가 흐르게 했다. 독자들이 그의 피 비린 냄새를 삵의 혀로 읽으며 자신의 사랑을, 욕망을, 슬픔을 치유하는 동안 그가 지나다니며 바라보던 전철역 옆 작은 공원의 동백꽃은 활짝 피기도 전에 자주 떨어졌고, 그의 집 앞 전깃줄에 거꾸로 매달린 까치의 마른 날개에서 피 비린 냄새가 풍겼다. 누구에 대한 낯선 비유였을까.

  그의 피는 언젠가부터 정적인 공감을 기반으로 한 것에서 직관의 것으로 맹렬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피 냄새가 두려워졌다. 몸속을 돌며 그의 실존을 증명하던 피는 몸 밖으로 흘러나왔고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는 허공이었고 허무였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이 없는, 생명과 죽음이 미분화된 우주의 원초적 허공이요 허무였다. 그렇게 그는 우주로 돌아가는 때를 직감하고 있는 듯 마지막 나눈 대화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다. 이미 자연과 일체가 되어버린 그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충규 시인과 나는 시인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함께 다녀오곤 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우리는 남보다 일찍 자리를 빠져나와 전철을 탔다. 시를 쓰면서 알게 된 사이였지만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주로 건강과 가족,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아내에 대한 배려가 각별했는데, 모임이 끝난 후엔 반드시 집에 전화를 했다. 그런 아내를 자신의 영정 앞에서 슬피 울게 했다. 슬픔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산 자의 몫이라고 그렇게 훌쩍 가버린 그의 가족에겐 고난의 태양이 날마다 뜰 것이다. 홀로 신화의 길을 택한 그에게 어느 야속한 달빛이 함께 하는 것인지, 죽은 자는 정녕 말이 없는가.

 

  그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곧 만나면 건네주려고 안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녔는데 곧이 영원이 되고 말았다. 늘 보던 고동색 자켓과 갈색 구두, 한결같던 머리 모양의 사진이다. 오늘날 글쓰기를 전업으로 한다는 것은 가난과 함께 하는 일이다. 살아서 그 흔한 자동차 한 번 운전해보지 못한 그의 손이 사진 밖으로 나와 나를 향해 흔든다. 어린아이의 것처럼 곱다. 문명의 기기에 물든 우리네 것과는 달리 깨끗한 손을 흔들며 낙타를 닮은 두 발로 터벅터벅 어디쯤 가고 있을까. 혹여 그리 급하게 떠나느라 머나먼 길 어느 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실 돈마저 챙기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이제 그의 발자국 소리는 그가 믿었던 신만이 들을 것이다. 아무런 생도 닿지 않는 곳까지 사진을 던진다.

  '잘 가게 친구.' ▩ (p. 1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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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홍배_산문집 『내 마음의 하모니카』 2023. 9. 11. <시산맥사> 펴냄

 * 배홍배/ 1953년 전남 장흥 출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단단한 새』『바람의 색깔』『라르게토를 위하여』, 산문집『추억으로 가는 간이역『풍경과 간이역』『송가인에서 베토벤까지』『Classic 명곡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