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도다리 쑥국
배홍배
김충규 시인과 함께 통영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가 김춘수 문학상을 수상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여섯 시간 이상이나 달리는 내내 우린 서로 말이 없었다. 물이 잔잔한 바닷가나 산기슭에서 아무렇게나 불어오는 봄바람이나 꽃잎들의 가벼운 귓속말에 우리의 귓바퀴도 함께 얇아지고 있었다. 미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져 흐르는 어린 꽃잎들이 하늘하늘 날리는 산길과 바닷길을 돌아가며 달리는 코란도 승용차의 엔진은 때로는 하늘을 행해, 바다를 향해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뭔가 중얼거리듯, 투덜거리듯 달렸다. 그것이 어떤 이의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걸 알 수도 있었을 터인데 바다는 조용했고, 어스름이 내려오는 산길 도로는 발자국도 없이 사람과 사람을 지는 햇빛의 운명 속으로 떠밀고 있었다.
통영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거제 남쪽 끝 바람의 언덕을 향해 달렸다. 단 한 권 『폭풍의 언덕』을 남기고 30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처럼 폐결핵을 앓은 우리 두 사람이 바람의 언덕을 향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언덕 아래 깎아지른 벼랑을 향해 풀들이 일제히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몸속의 뼈들은 휘었다. 그는 벼랑길을 따라 위태롭게 내려갔고 그의 등 뒤로 초승달이 비수처럼 번뜩였다. 나는 알았어야 했다. 초승달이 찌르는 시간의 모습대로 누군가 머무르다 가야 한다는 것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모습으로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시간을 언젠가는 그리워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문득 멈춰 섰다. 유령처럼 그가 돌아서 두드리는 시간의 바깥에서 자욱이 안개가 밀려왔다. 그때 바랜 책장의 흐릿한 문장처럼 서성이던 그를 이해한 것은 수백 일이 지난 후였다.
해가 지고 통영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외곽 어느 곳에 우리는 차를 세웠다. 바람에 속살이 깎아져 내린 붉은 황토의 둔덕 위에 쓰러질 듯 서 있는 가시나무 울타리 집이었다. 도다리쑥국 집, 색 바랜 양철 간판이 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는 지나칠 수 없는 음울한 음악이었다. 김충규 시인과 나는 평소 위장이 튼튼하지 못해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봄 쑥과 싱싱한 도다리를 넣어 끓인 멀건 국물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밥을 먹다 말고 상 위에 쌓이는 물고기의 앙상한 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수면 위에 떠오른 물고기의 눈에 처음 비친 물 밖의 빛은 어떤 것이었을까.'
물고기가 죽어가며 기억하는 것들은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마흔 여덟 개의 상처 난 지느러미를 흐느적거리며 그의 눈은 멀건 도다리의 바닷속을 천천히 헤엄쳐 가고 있었다.
김충규 시인은 48세란 젊은 나이로 가난하게 살다 갔다. 가난은 보편적 역사로부터 자의에 의해 유배당한 자신만의 열렬한 신화다. 그는 밝은 태양의 대로를 멀리하고 어슴푸레한 달빛이 함께 하는 신화의 길을 택했다. 남극을 최초로 탐험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아문젠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는 남극 탐험가는 영국의 스콧 대령이다. 아문젠 일행은 동쪽으로부터 썰매를 이용해 탐험에 나섰다. 중도에 식량이 떨어지면 개를 잡아 먹으며 나아가는 전형적인 인간 중심의 정복 탐험이었다. 그러나 스콧 일행이 인간의 힘만으로 썰매를 끌며 천신만고 끝에 남극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노르웨이 국기가 34일 전에 꽂혀 있었다.
경쟁에서 2등은 없다. 아문젠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탐험에 성공한 것에 반해 스콧 일행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도중 목적지를 18㎞ 남기고 전원 동사하고 만다. 하루면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들의 유품 중엔 280㎏이 넘는 오디오 전원용 발전기를 포함한 턴테이블, 앰프, 스피커, 몇 개의 클래식 앨범들이 발견되었다. 죽음과 싸우는 여행에선 단 1㎏이라도 가볍게 하는 것이 상식인데 음악이라니···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낙오자들이었다. 아문젠은 역사를 썼고 스콧은 신화를 만들어냈다.김충규 시인은 스스로 낙오자의 길을 택했기에 그가 드리운 긴 신화의 그림자 속으로 세상의 저녁은 이운다.
그가 떠난 지도 벌써 십 년이 더 흘렀다. 한 가족의 가장, 우리의 친구, 시인 김충규가 없는 세상에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르고 봄은 와서 꽃은 핀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봄볕이 내리는 곳은 그가 떠난 빈자리고, 봄 들판에 피는 꽃들은 그가 벗어두고 간 신발들이다. 그의 신발을 찾아 다시 통영에 내려왔다. 그 옛날 그와 함께 들렀던 도다리쑥국 집은 헐리고 없다. 언덕만 남은 빈터에서 그를 생각하며 혼자 오랫동안 서 있다. 가시나무 사이로 야생 고양이 한 마리가 날카롭게 운다. 고양이의 울음에 찔리는 어둠보다 꿈이 먼저 아파 온다. 꽃씨 하나 빗 떨어진 흙무더기에서도 그의 선한 눈매를 닮은 반달은 뜬다고 이름 없는 밤새는 울고 간다.
▩ (p. 1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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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홍배_산문집 『내 마음의 하모니카』 2023. 9. 11. <시산맥사> 펴냄
* 배홍배/ 1953년 전남 장흥 출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단단한 새』『바람의 색깔』『라르게토를 위하여』, 산문집『추억으로 가는 간이역』『풍경과 간이역』『송가인에서 베토벤까지』『Classic 명곡 205』등, 오디오평론가, 사진가, 번역 활동, 한국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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