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ㄹ'이라는 슬픔
차주일
핸드폰 잠금장치 암호로 'ㄹ'을 모신다. 이를 본 지인이 참 간단하게도 설정했노라 말했지만, 나에게 기호 'ㄹ'은 가장 복잡하고 긴 감정이며 가장 성스러운 상징이다. 딸 셋을 둔 어미가 천일기도 끝에 넷째를 낳은 날이었단다. 세상에 그토록 가슴을 졸인 날이 없었다고 한다. 장손인 나를 낳고서 시부모로부터 절대 신뢰와 무한 사랑을 얻으셨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아들 선호가 절대 명제이던 1차 농경 산업 시대, 첫아들을 기다리던 어미의 기도문을 알듯도 하다.
어미는 아들 형제 없이 딸만 둘인 집안에서 열다섯에 시집살이를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어린 딸을 시집보낸 외할머니는 사돈댁 동네 어귀에 쪼그려 앉아 묵정밭을 일구는 어린 딸을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내 어미의 어미가 백일쯤 된 나를 두고 돌아가시고, 내가 열다섯이 되었을 무렵, 어미는 목욕시킨 나를 데리고 당신의 꽃가마 길을 거꾸로 걸었다. 그리고 돌더미에 가까운 묵묘 앞에 큰절을 올렸다. 내 어미가 무덤 속 어미에게 절을 올리는 자세는 지성으로 성스러웠다. 그 절이 새벽 기도 자세와 같음을 발견하였을 때는 북받치는 감정을 가누기 힘들었다. 제 새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자세와 제 어미의 영면을 기원하는 자세가 똑같았다. 나는 지금껏 이보다 진심 어린 사람의 자세를 단연코 본 적 없다.
새끼를 낳은 어미가 제 낳은 어미에게 올리는 큰절을 본 적 있는가? 내 열다섯 그날, 한 마리 새끼로 어미의 자세를 엿보지 않았다면, 나는 결단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어미의 큰절 자세는 'ㄹ'이었다. 온 근육과 온 관절과 온 힘줄과 온 신경과 온 마음을 맞춰 숨 한 번 내쉬지 못하는 제 몸을 번제물로 올리는 자세는 산 사람이 만든 주검의 자세였다.
어미가 절을 풀고 숨을 들이며 산 사람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숨소리를 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때 어미가 말했다. "아들아, 외할머니께 절 올려라." 돌이켜보니 이보다 숭고한 명령문을 경험한 적 없다. 이토록 강한 인상은 주제적 관점으로 작용하여 나를 시인되게 했다. '자식의 밥을 구하기 위해 일생을 살아낸 어미가 신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시를 써 과찬을 듣기도 했다. 졸시에서 "나는 내가 개종하는 날을 알고 있다."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실로 어미가 돌아가신 날 나는 비로소 나의 신을 모실 수 있었다.
밥을 앞에 두었을 때 나는 성호를 물리고 'ㄹ'을 그린다. 새끼를 낳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미의 큰절을 그린다. 어미가 제 머미 무덤 앞에서 갖추는 정성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자시'ㄹ'은 새끼를 낳지 못하는 사내에게 출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기호이다. 'ㄹ'의 일생을 흉내라도 내며 살아낸다면, 나는 죽는 날 단 한 번 나를 출산할 것이다. 출산을 겪지 못한 몸은 신이 될 수 없겠지만, 'ㄹ' 자세로 숨을 죽이면 나의 신께서는 내 기도를 찾아와 나를 살려놓고 가시곤 한다. ▩ (p. 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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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주일_산문집 『출장보고서』 2023. 8. 17. <포지션> 펴냄
* 차주일/ 전북 무주 출생, 시집『냄새의 소유권』『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합자론合字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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