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강경호_평론집『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 만종 : 추영희

검지 정숙자 2023. 8. 16. 01:11

 

    만종

 

    추영희

 

 

  밀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린 저녁종

  한 때의 유물 같은 평화로

  낡은 종탑에서 타종되는 하루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들에 닿았다 돌아오는

  저녁 거느린 종소리 아름답다

  할 뻔했다

  밤새 종 안으로 웅크려 들었다가

  생육하고 번성한 것들 하루 내 생사

  시퍼렇게 내미는 새벽종

  희망의 입구라

  할 뻔했다 대책 없이

  굶주린 땅 죽어가는 아이의 눈도 목격한 햇살

  주르르 흘린 혈변 같은 저 노을 또한 아름답다

  할 뻔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만든 뜻 따라 생육하는 말로

  붙여진 온갖 것들 번성할수록

  종소리와 종루의 헐어진 속들 위장약을 틀어넣으며

  절룩절룩 붉게 돌아오는 저녁

  마지막 생기를 불어 축복하던 피조물들 그 뜻대로 부디

  낡은 종탑 반대편 땅에서도 은은한 소리로 저물어

  반성하는 포성과 울음 대신 삽을 꽂아놓고 조용히

  손 모으고 있는 가난한 부부와 아이들

  밀레의 만종으로 다시 그려진다면

  오래된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오는 종소리

  이젤을 넘어뜨리고 경건하게 부활하는 저녁

  저 혈변이 천사의 거룩한 피가 되겠는지

      -전문-

 

  밀레의 그림과 (···) 추영희의 시(발췌)_강경호/ 문학평론가

  삼종기도三鍾祈禱는가톨릭에서 매일 아침 · 정오 · 저녁에 세 번 종 칠 때마다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축원하고, 성모마리아를 공경하는 뜻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밀레는 어린 시절, 들에서 일하다가 삼종기도의 종소리가 들리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기도를 했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의미로 그린 밀레의 「만종」은 삼종기도 중 가장 나중인 저녁무렵 들판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종소리와 함께 기도하는 농부 부부의 모습이다. 

  추영희의 「만종」에서 밀레의 「만종」을 기억하는 화자는 "한 때의 유물 같은 평화로/ 낡은 종탑에서 타종되는 하루"라고 말한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들에 닿았다 돌아오는/ 저녁 거느린 종소리 아름답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화자는 다음 행에서 "할 뻔했다"라고 말하며 그렇지 못한 현실임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밀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린 종소리"라고 작품의 서두를 연 것이다. "밀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린" 저녁종인 만큼 화자가 인식하는 현실은 부정적이다. "밤새 종 안으로 웅크려 들었다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들 하루 내 생사/ 시퍼렇게 내미는 새벽종/ 희망의 입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또다시 "할 뻔했다"며 부인한다. 역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로 인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또다시 "대책 없이/ 굶주린 땅 죽어가는 아이의 눈도 목격한 햇살/ 주르륵 흘린 혈변 같은 저 노을 또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가, "할 뻔했다"며 역시 부정한다. 이처럼 화자가 ' ~ 할 뻔했다'는 식으로 부인한 것은 밀레의 「만종」의 배경인 하늘에서 하루를 거두는 일몰의 햇빛이 들판을 밝혀주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들판을 비춰주는 햇빛은 "굶주린 땅 죽어 가는 아이의 눈도 목격한 햇살"이기에 아름답지 못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p. 시 40-42론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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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호_평론집 『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에서/ 2022. 9. 30. <에코미디어> 펴냄

  * 강경호/ 1992년『문학세계』로 평론 부문 & 1997년『현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문학평론집『휴머니즘 구현의 미학』『서정의 양식과 흔들리는 풍경』『문학과 미술의 만남』외, 미술평론집『영혼과 형식』, 연구서『최석두 시 연구』, 시집『언제나 그리운 메아리』『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함부로 성호를 긋다』『휘파람을 부는 개』『잘못든 새가 길을 낸다』, 에소리를 주제로 한 에세이집『내 마음의 소리』, 기행 에세이집『다시, 화순에 가고 싶다』『역사와 생명의 고을, 무안』『화순누정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