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순전히 내 오해일 수 있었다
신상조/ 문학평론가
잠자고 있는 아들을 살해한 60대 청소부에 관한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은 사법시험에 연거푸 낙방한 터였다. 차마 그럴 수 있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물과 땀에 뒤범벅이 되어 퇴근했는데 최소한의 열심조차 보이지 않는(것처럼 여겨지는) 자식이 눈앞에 있다면 누군들 이성을 잃을 만큼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순전히 내 오해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부인 아버지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절망한 거였다. 어쩌면 무능한 아비의 삶을 반복할지도 모를 아들의 삶을 그는 자기 손으로 끝장내 주고 싶었던 거다. (p. 14-15)
휴무를 맞아, 그동안 벼르던 제발트의 소설을 펼쳐 들었다. "보고에 대한 보고이며, 역사적 기록들이며 문학적 사생아이다."라는 이리스 라디슈(Iris Radisch)의 말처럼, 그의 소설에는 역사적 기록들이 넘친다. 그중에서도 노동에 관한 글에 유독 관심이 간다. 우리의 뇌는 선택적으로 집중하게 되어 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건 사실 매우 과학적인 말이다. 모든 문학은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작가의 삶과 그의 내면이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확신이 든다. (p. 29-30)
그런 내가 환경미화원이 된 데는 매문위활賣文爲活을 할 정도로 청탁이 줄을 이은 것도 아니고, 문화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를 활용할 주변머리가 없었던 탓이 크다. 물론 진을 빼가며 원고를 써도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 문학 환경에 화가 나기는 했었다. 거기다가 자기 고집대로 하는 바람에 기어코 가계를 위태롭게 만든 남편한테 자학적으로 화를 내려는 치졸함, 형편에 맞춰서 사는 본을 자식들한테 보여줘야 한다는 맹모孟母적이고도 강박적인 심리가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렇더라도 굳이 백화점의 야간 환경미화원이 된 이유란, 한 주에 이틀 있는 강의 시간을 피해 갈 수 있고 '주5일 근무제'여서 쉬는 날 원고를 쓸 수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 서서였다. 무엇보다 일을 시작할 때는 몇 년을 지지부진하던 논문 주제가 통과되어 비로소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점이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하다가 형편이 나아지는 즉시 '때려치우고' 싶었다. (p. 38-39)
적어도 일 년은 작정했던 미화원 일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달로는 여섯 달이니 반년을 겨우 채우고 만 거다. 그러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거리 경주하듯 살았다. 24시간을 쪼개서 일하고, 수업하고, 책 보고, 글 쓰고, (가끔) 살림 살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같이 아슬아슬한 생활이었다. 미쳤나? 미쳤구나! 아니야, 넌 해낼 수 있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 땐 속으로 그런 주문을 외곤 했었다. (p. 75-76)
토끼잠을 자가면서 틈틈이 일하고 책을 읽는 건 오랜 습관이었다. 마흔이 넘어 시작한 공부에 서재 같은 건 엄두를 낼 처지가 아니어서, 아이들이 TV를 보는 옆에서 책 읽고 글을 써서 등단도 했다.눈치 보지 않고 실컷 책만 읽고 싶어서 한 등단이었다. 책 읽고 글 쓰는 게 직업이 되었으니 소원을 절반은 이룬 셈이다. 경주마는 곁눈질을 못하도록 눈 옆을 가린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건만, 나 스스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남들 보기엔 열정적이거나 별났겠고, 나 스스로는 결핍과 부재를 확인하는 연속이었다. 결핍(욕망)에 시달리며 달려가지만, 도착한 곳은 언제나 '여기가 아닌데(부재)'라는 실망. (p. 76)
김성수(꼭두 조각가): 제가 작품의 재료를 구하는 방식을 아신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재료를 취할 때 가급적이면 오늘처럼 추운 겨울에, 그것도 남쪽보다는 북쪽 산에서 자란 나무를 선호합니다. 북쪽에 있는 산에서도 기왕이면 좀 더 가파른 곳에서 자란 나무가 좋습니다. 그런 데서 자란 나무들은 빛을 제대로 쬐지 못해서 한마디로 못 먹고 못 자란 놈들이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병을 앓아서 비틀어지며 자란 것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나무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비틀어짐에서 나오거든요. 겨울나무란 물을 먹지 않아서 단단하다는 이점도 분명히 있지만, 좋은 작품이 될 나무는 희한하게도 그런 척박한 땅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발견되곤 합니다. 재료 속에 작품의 형상이 이미 들어있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그렇게 비틀린 놈들로 조각을 하면서 되도록이면 가지를 치지 않고 나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형태를 유지해주려고 하거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힘겹게 살아온 나무에 대한 제 식의 위로이자 보상인 셈이지요. (p. 103-104)
박정남(시인): 예술가는 시대의 고통을 개인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여 앓는 민감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말이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제 얘기를 하자면, 저는 지천명의 나이에 교직을 명예퇴직하고 집안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때 딸들이 둘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지요. 그 애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몸에 병이 왔어요. 슬픔도 습관처럼 길이 들더군요. 어느 날, 절에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 속에 정작 가정의 중심인 제가 늘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 어린 나를 기도해주던 할머니도 떠오르고··· '소중한 나'를 재발견했다고나 할까요. 나를 위한 기도가 시작되면서 온갖 세상 걱정과 함께 쓸데없이 껴안고 살던 가족들도 제자리로 돌려놓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서서히 제 몸이 치유되는 걸 느꼈습니다. 김성수 선생님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꼭두를 통해 잃어버린 유토피아나 원초적 고향을 느낄 수 있어서입니다. 또한 지치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상적인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위로가 꼭두 시리즈에는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졸시 「진달래꽃」이나 「포옹」 등에 들어있는 이미지와 접점을 이루는 세계를 만났기에 무척 기뻤습니다. 이른 봄, 아직은 춥고 황량한 산에서 꺾어오는 진달래꽃이 "캄캄한 데서 꺼내온 색"(「간절함이 묻어 있다」)이듯이, 제겐 꼭두가 가진 밝고 강렬한 색채와 어두움이 따로 분리되지 않았으니까요. (p. 108-109)
안민열(연출가 & 배우): 따지고 보면 예술적 '전복'이라든가 예술적 '상상력'은 예술적 '저항'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술은 예지 그리토프스키(Jerzy Grotowski)가 말했다시피 '놀음'이 아니고 '저항'입니다. 저는 예술가란 '사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데요, 예술적 저항 역시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예술은 표현에만 집중하다 보니 내용 없는 추상만 남았어요. 형식은 비록 추상일 수 있어도 메시지는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게 연출가이자 배우로서의 제 가치관입니다. (p. 134-135)
1996년 겨울호부터 2000년 가을호까지의 『시와 반시』를 끌어안고 산 일 년 동안, 90년대 후반의 문학에서 이미 발견되는 2000년대 문학의 전조를 간략하게나마 짚어보고자 하는 욕망이 미적지근하게 식고 만 이유도 그래서이다. 미시적인 텍스트 분석으로 문학의 시대적 징후를 짚어보기는커녕 문학적 포즈로 느껴지는, 겉멋을 잔뜩 부린 글들을 내가 몹시 역겨워한다는 개인적 취향을 깨달은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랄까. (p. 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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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조 산문집 『시 읽는 청소부』에서/ 2022. 10. 1. <시와반시> 펴냄
* 신상조/ 경북 구미 출생, 201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붉은 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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