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네잎_상처받은 '나'들(발췌)/ 어두운 골목 : 주민현

검지 정숙자 2023. 5. 10. 00:31

 

    어두운 골목

 

    주민현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와 걷기 시작했지

  익선동의 작은 골목을

 

  당신은 언젠가 돌반지를 사러 여기에 왔고

  나는 오래전 연인과 이곳에 왔었지

 

  그때 우리는 서로를 몰랐고

  지금은 서로에게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걷고 있다

 

  사랑은 있겠지, 쥐들이 사는 창문에도

 

  골목 끝의 허름한 모텔과

  취객이 갈기고 간 흔적을 모른 척하며

 

  정말 사랑은 있겠지, 시궁창 같은 인생에도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당신은 속없이 큰 소리로 유행가를 부르고

  누군가 비웃듯 웃으며 지나간다

 

  당신은 결혼해서 불행해진 어느 부부를 알고 있고

  나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지금은 잊었다

 

  서로 다른 영화를 보면서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아이는 자신의 가장 싫은 부분을 닮는다

  아이를 향해 윽박지르는 남자는

  사실은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거다

 

  휴일이란 아직

  책의 남은 페이지들과도 같아

 

  우린 싸울만한

  여든일곱 가지의 이유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 낮잠을 자기로 한다

    -전문, 『킬트, 그리고 퀼트』/ 문학동네, 2020.

 

  ▶상처받은 '나'들(발췌) _김네잎/ 시인

  영화를 보고 그때는(장소를 겹쳐 있지만) 서로를 몰랐던 둘이 지금은 공유 지점이나 관계성이 있다는 듯 "서로에게 비스듬히 기울어져" "익선동의 작은 골목"을 걷고 있다. 이 시에서 나와 당신은 사랑과 관계에 회의적이지만, 사랑을 믿고 싶은 속마음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있겠지, 쥐들이 사는 창문에도" "정말 사랑은 있겠지, 시궁창 같은 인생에도"라며 사랑의 불가피성을 재차 확인한다. 어쩌면 그들은 사랑을 하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지금은 잊었다"라고 하지만, 지독한 '상심 증후군'에 의한 착각일 뿐이고, '상심 증후군'의 반작용으로 사랑과 상처에 무감해지려 애쓰고 있다. (p. 시 100-101/ 론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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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詩魔』 2022-겨울(14)호 <시읽는 계절>에서

 * 김네잎/ 2016년 ⟪영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