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우신

검지 정숙자 2023. 5. 10. 01:48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우신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요

 

  감나무와 가로수와 하천을 옮겨가며 체온을 바꾸는 햇살과 바람과

  걸음 소리와 기찻길을 모두 줄게요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우월해지는 사람

  유전되는 사람

 

  어느 날은

  그림자가 신의 귀 같아요

 

  신은 우리 집에 사랑과

  우울을 흘려놓고

 

  그것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것을 죽어가는 병아리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세상의 징검다리에 대해 썼어요

 

  신은 구름으로 퍼즐 놀이를 하며

  폭설을 일으키거나

  무지개를 띄워놓고 긴 잠을 잡니다

 

  우리는 새끼오리들을 옮겨주거나

  물 위에 나뭇잎을 띄우고

 

  멀리 간 바람과

 

  우물 바닥 이끼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보는

  아주 오래된 햇살에 발등을 적셔보고

 

  서로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었습니다

 

  말을 잃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식으로부터

 

  반복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등이 간지러워지는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가

   -전문,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요』/ 아시아, 2022.

 

 

  김이듬 : 친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와의 생동감 있는 관계의 시 같았어요./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두 분은 시가 써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略···)

  정우신 : 저는 청탁이 들어오면 많이 쓰는 편인데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친구들을 만나서 놀다 보면 제가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 기억을 끄집어내서 이미지도 붙여보고 서사도 길게 늘여 붙여보게 됩니다. 정말 안 써지면 첫 줄만 써보자, 한 줄만 써보자 하며 이어가며 탄생시키는 것 같습니다.

다. (p. 시 154-156/ 론 156 -略-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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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詩魔』 2022-겨울(14)호 <책방이듬에서 읽는시집_서늘한 눈물의 정원/ 장석원 · 정우신 시인과의 만남/ 2022년 9월 29일 저녁 7시>에서 발췌

  * 정우신/ 1984년 경기 인천 출생,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비금속 소년』『홍콩 정원』

  * 김이듬/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마르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