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보수와 진보(부분)/ 오세영

검지 정숙자 2023. 4. 5. 02:14

<권두언> 中

 

    보수와 진보(부분)

 

    오세영/ 시인

 

 

  춘추전국 시대의 난세를 요순堯舜의 성왕정치聖王政治로 극복코자 했던 공자의 왕도사상王道思想은 비록 과거 지향적이었다 할지라도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으며 서구의 르네상스 또한    그리스 고전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과거적인 것으로부터 깨우침을 얻었지만 중세에 대해서는 진보적이었다. 즉 삶의 발전이란 과거적인 것의 전통이나 가치를 재발견 혹은 선양하는 데서 오히려 완전을 기할 수도 있다.

  이는 문화 예술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문학사에서는, 세계 문예사조는 일반적으로 '낭만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의 상호 교차 반복으로 전개된다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 그 어느 시대나 새롭게 등장한 사조(진보적 사조)란 실상 그 처한 현실을 과거적 원리(보수적 가치)를 통해 계승 발전시키거나 혹은 극복한다는 주장이다. 가령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해 진보적이었으나 그 이상은 중세적 세계관에서 찾았고 고전주의는 낭만주의에 대해 진보적이었으나 그 토대를 낭만주의보다 더 과거적인 고전주의에 두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전위적이고도 실험적인 사조라고 믿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떨까. 물론 리얼리즘에 반동하는 문예사조라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과거 지향적이 아닌가. 그 같은 관점에서는 '보수'가 '진보'보다 오히려 탈과거적이라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따라서 누가, 진보는 탈과거적이어서 가치를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보수는 과거 지향적이어서 가치를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보수는 과거 지향적이어서 가치를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창조를 최선의 가치로 여긴다. 모든 예술은 새로운 것의 창조에 그 본질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부단히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알에서 부화한 어린 새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 홀로 푸른 하늘을 향해서 나래를 치듯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어떤 미지의 세계로 비상을 꿈꾸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 어느 시대든 보편적으로 예술가들이 보수를 기피하고 진보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앙드레 지드가, 사르트르가, 혹은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시인들이, 이미 그 실패가 필연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 체제를 굳이 옹호하면서 그들 스스로 진보적 좌파라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조금 관심을 갖고 성찰해 보면 과거나 현재나 우리가 직면했던 문화 예술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 암흑기, 해방의 혼란기, 권위주의 군부시절과 이어 유신을 물려받은 오늘의 우리가 또한 모두 그러했다.

  이상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진보라고 할 경우, 그 지닌 바 덕목은 물론 현실의 모순이나 한계를 극복 혹은 혁파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항상 부정적이고 이상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아니다. 현실이 항상 가치 있고 이상이 항상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가지 가치에 몸을 기대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p. 19-20)

 

 -------------------------------

  半年刊誌 『한국시인』 2023-봄/여름(4)호 <권두언>에서

  * 오세영/ 1965-1968 박목월에 의해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등, 학술서『시론』『한국현대시분석과 읽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