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천 시인 추모>
천진불天眞佛의 시인
박제천
장덕천 시인이 영면하셨다.
1939년(대전) ~ 2023. 2. 3. 향년 84세.
완벽한 고독
장덕천
철저한 외로움에는
날 세운 생각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자연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외로워 본 사람은
고고한 자연에서 진리의 빛을 본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귀로 듣고 비움을 통해 심재가 되는.
그릇도 비워야 그릇이 된다.
-전문(p. 123)
* 2023년 2월 3일 별세. 이 작품이 선생이 마지막으로발표한 유작시가 됨.
* 1996년 『문예한국』으로 등단, 시집 『사람이 시다』『브람스의 자장가』『책장과 CD룸 사이』『수통골 돌밭』『어둠은 아름답다』『풀벌레에게 밤을 주고』『나는 소리 부자다』『단풍나무 악보』외, 수필집『바람은 흔들림으로 존재한다』외, 대전문학상· 문학사랑상 · 전훈문학상 ·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2015)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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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略···
시인은 사실 근육병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기에 요양차 이곳(연꽃마을)에 터를 잡았고, 무료함과 적막함, 고독감과 같은 병자의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연꽃 키우기에 마음을 의지했던 것이다. 그 연꽃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연꽃을 찾아오지만 시인은 여전히 홀로일 수밖에 없었다. 삶의 경계 밖에서 시인을 돌아보자면 더 큰 절망감에 휩싸일 수도 있는 처지이지만 시인은 의연하게도 그 버려지고 잊혀짐을 연꽃으로 되살려내는 삶의 여유, 시의 미학으로 형상화한다. 필자가 시인의 이 작품을 즉절에 빗대어 말하는 까닭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오랜 지병'에 대해 알아보자.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어둠은 아름답다』에 쓴 이흥우 시인의 발문에서 추려낸 내용이다.
1998년 7월, 강원도 춘천의 위도, 『문학과 창작』 · 문학아카데미가 주최한 숲속의 시인학교에서 장덕천 시인을 처음 만났다. 대충 공식행사가 끝나고 밤이 깊어가며, 몇몇 나이든 시인을 위해 마음을 써준 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잡담들을 했다. 성찬경, 김광림 시인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행사를 주관하는 젊은 시인들이 장덕천 시인을 인도해 왔다. 정확하게는,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장덕천 씨와, 또 한 사람, 자동차 운전을 비롯해 몸이 불편한 장 시인을 손과 발처럼 돕는 신태수(申泰秀, 독실한 불교인이며 수필가)였다. 두어 병의 색다른 술과 안주를 들고 왔었다. 장 시인의 농토에서 거둔 오미자를 소주에 담가 묵힌 오미자술이었다. 밤이 늦도록까지 우리는 그 두 병의 술을 다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덕천 시인은 충남대학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일찍 이름있는 기업체의 경영자였다. 그런데 40대 때에 어느 날 교통사고(상대방의 실수였으나,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하지도 않았다 한다)로 몹시 다쳐 2급 장애인이 되었다. 상태는 점점 더 악화해서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은 지 몇 해가 지났으나 '이상하게도 오래 견디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견디는' 동안에 그는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보다는 그의 속에 일찍부터 있었던 시의 마음詩心이 육체적인 수난과 고통을 견디면서 차차 깨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시심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한 사람의 가혹한 육체적 고난과 고통은 그런 시의 마음, 시의 정신, 시에의 추구를 더욱 끈질기게 집중시켜 줄 수도 있다.
조금 긴 것 같지만, 이흥우 시인의 글을 통해 장덕천 시인의 신변사를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장덕천 시인을 만나고서 꽤 많은 시간이 흘러온 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1997년에 시인을 처음 만났다. 1988년에 개설한 문학아카데미 방산사숙은 2000년까지 서울 대학로 이화동 133번지의 한 건물 2층에 편집실을 두고, 3층을 강의실로 사용했다. (방산사숙은 2001년 동숭동 2-19 낙산빌라 101호, 현재의 사옥으로 이전했다.) 그 시절, 간병인의 등에 업혀 3층의 강의실에 들어서는 시인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지만 나는 차마 그리 몸을 다친 경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시가 뭐기에 그 불편한 몸으로 대전에서 서울까지 차를 타고와, 다시 등에 업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나.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시인은 너무나 꿋꿋했다. 이흥우 시인의 글처럼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경청을 하며 수첩에 깨알같이 기록을 했다. 시가 있어 행복하고, 시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아마도 그건 시인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 p. 304-305/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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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창작』 2023-봄(177)호/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_ 장덕천 시인 추모>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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