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 essay>
호박꽃 초롱 서시
백석(1912-1996, 84세)
한울은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둘우래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 내는 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틈한 초가지붕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
공중에 떠도는 흰 구름을 사랑한다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아늑하고 고요한 시골 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
이러한 시인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
이런한 시인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
그 이름이 강소천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전문(p. 10-11)
▶ 시인, 하늘이 사랑하는/ 백석의 「호박꽃 초롱 서시」(발췌)_ 노춘기/ 시인
「호박꽃 초롱 서시」는 백석이 만주의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거주하던 무렵의 시편 중 하나이다.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일본은 1932년에 만주국을 세운 후, 정책적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만주로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특히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등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만주는 조선의 문인 및 지식인들에게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백석에게 '북방'은 젊은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고, 만주는 그 북방의 구체적인 표상이었다. 그는 굴곡이 많았던 조선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무렵부터 학생들과 만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다거나 입버릇처럼 "만주로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함흥에서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39년에는 만주의 안동(安東, 지금의 단둥) 지역을 여행하고 그 체험을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1940년 초 결국 백석은 만주로 떠났다. 조선에서의 삶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점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미리 직장을 정해 놓거나 정착할 곳에 관한 계획을 세우고 떠난 것이 아니었기에 신경에서의 실제 생활은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백석은 그해 3월부터 만주에서 경제부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창씨개명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해방 전까지 만주를 떠나지 않고 장편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경성에서 출간하기도 하고, 만주 체험이 담긴 시를 국내 잡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백석은 경성으로 보낸 편지에 "이 넓은 벌판에 와서 시 한 백 편 얻어 가지고" 가겠노라 호언하였지만, 만주에 머무는 동안 발표한 작품은 「수박씨, 호박씨」「북방에서」「허준」「호박꽃 초롱 서시」「조당에서」「두보나 이백같이」「촌에서 온 아이」「흰 바람벽이 있어」「귀농」 등 열 편이 되지 않았다. 「호박꽃 초롱 서시」는 영생고보 제자였던 강소천이 1941년 2월 경성에서 발행한 동시집 『호박꽃 초롱』에 시 형식의 서문으로 써 준 것이다. 만주 시절의 다른 시편들에 비하여 늦게 발굴된 이유로 많이 알려지지 못한 작품이다. (p. 8-10)
* * *
후배 시인이 시집에 헌정하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추천사로 읽을 수도 있는 범상한 작품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독립적인 한 편의 작품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자마자 갑자기 마음이 흔들리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느닷없는 감정을 말로 쉽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인 것 같다. 그냥 갑자기 내 모든 마음의 굴곡을 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에게서 최초로 '용서'라는 것을 받았을 때의 당혹과 충격을 생각하게 되었다.
강소천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궁핍한 시대에 냉담한 세계 속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민 자신의 작품을 두고서,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스승이자 선배 시인이 위로를 위한 위로, 격려를 위한 격려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자신의 전 세계를 걸고서 이렇게 절절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하늘이 너를 사랑한다', '병이리와 버섯. 흰 구름과 개울물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늘이 너를 사랑한다'는 그 말,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그 말을. (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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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2-가을(26)호 <권두 essay> 에서
* 노춘기/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2003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오늘부터의 숲』『너는 레몬나무처럼』『너는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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