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부분)/ 장석주

검지 정숙자 2023. 3. 4. 16:04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부분)

 

    장석주/ 본지 주간

 

 

  서정시가 시인의 내밀한 욕망과 감정의 마그마의 분출이라면 그 에너지는 우리 안의 동물적 원초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사람마다 감정이 촉발하는 발화점들은 다르다. 감정은 제어되지만 불안정하게 솟구치는 걸 막기는 어렵다. 그 감정이 우리 안의 어둡고 무서운 힘으로 파열하듯이 분출하며 우리를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끈다. 때때로 시인의 주관적 감정은 비합리적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감정이란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듯이 이성적 추론이 미치지 않는 "맹목적인 힘"인가? 그것은 논리에서 어긋난 비사유의 영역에서 작동하는가? 슬픔, 두려움, 불안, 절망, 분노, 연민, 우울 따위 주체의 여러 감정이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시인은 감정에 포획되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시인은 감정의 일렁임을 관조하고 시의 이미지들을 불러낸다. 이때 감정의 애틋함은 기초적인 시적 동기일 테다. 감정은 시의 촉매일 뿐만 아니라 시에 생명과 그 실감의 풍성함을 불어넣는 기제다.

 

  시대마다 전복적 상상력으로 시대를 가로지르고, 유언과 비어를 채집하며, 그 안에서 시대정신의 표상을 찾아 빚은 위대한 시인들이 나왔다. 시는 존재 사건의 지층, 차이와 반복의 지층, 역사의 시간과 경험의 지층, 신체와 관능의 지층, 무의식의 지층을 품는데, 지층은 과거의 것들,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간, 하강과 퇴적의 산물이다. 시는 인생의 무상함과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한 줄의 노래인 것을! 시는 늘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시는 불확실한 것에 윤곽과 형태를 주고 다시 돌아간다. 좋은 시집은 지층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다.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거주한다. 계절과 기후, 편애와 갈망 속에 운모인 듯 반짝이는 이것, 먹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이것, 은유의 집적이며 어떤 전조와 예감과 우연을 품고 돌아오는 것, 그게 바로 시다. 한 시대의 끔찍함과 삭막함과 불행에 맞서며 동시에 시대를 넘어서는 힘과 용기를 주는 시집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불행했을 것인가! 우리는 김소월, 백석, 윤동주, 김수영, 김종삼, 박용래, 기형도 같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별로 떠오른 시인들의 생애와 그 시를 읽으며 그것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맥락을 조곤조곤 짚어보고, 시 없는 삶보다 시를 누릴 수 있는 삶이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 29-30/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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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산맥』 2023 - 봄(53)호 <권두시론> 에서

  *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몽해항로』『오랫동안』『일요일과 나쁜 날씨』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