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햇살마루 외 1편/ 우남정

검지 정숙자 2022. 12. 5. 01:41

 

    햇살마루 외 1편

 

    우남정

 

 

  아파트 108동과 1119동 사이로 일출을 볼 수 있다

  상강에서 입춘에 이르는 기간뿐이지만

  지구는 돌고 태양은 멀어졌다 가까워지며 겨울을 지나간다

  밤이 가장 긴 계절이므로

  여명이 붉어 오는 쪽으로 나는 머리를 둔다

  아침 햇살이 거실을 건너 발밑까지 밀려오는 것을 지켜본다

  찰방거리는 파도에 맨발을 담근다

  햇살을 가슴 끝까지 끌어 덮는다

  블라인드의 무늬를 지나가는 빛의 실루엣

  후숙後熟을 통과하는 빛깔처럼

  환하고 따뜻한 주황이 남실거린다

  누추한 화초 몇 포기가 바닥에 그림자를 벗어 놓았다

  빛나는 것은 왜 그늘을 더 도드라지게 할까

  햇살이 책꽂이의 냄새를 말리고 제목과 저자를 훑어가다가

  어제 읽다 만 페이지를 다시 읽는다

  소파에 한동안 걸터앉아 있다가

  어느 슬픔이 통과하는지 책 모서리 끝에서 글썽인다

  눈물이 없다면 무지개도 없을 것

  햇살은 눅눅한 살림살이를 말리고 어둑한 눈매를 씻어 준다

  갯벌에 무릎 꿇고 꼬막 캐는 아낙처럼

  탁자 밑에서 숨은 동쪽을 찾는다

 

  도시의 겨울 틈새로 동백꽃 한 송이 피어났다

       -전문(p.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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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파이어의 봄

 

 

  우중충한  참나무 숲이 순간, 일렁인다

  검은 망토를 들추는 바람

  보굿이 꿈틀거린다

  짓무른 땅에서 누군가 주검을 밀고 깨어난다

 

  까칠하던 나뭇가지가 반지레해졌다 화살나무 허리춤에 푸른 촉이 장전되었다 물오른 꽃봉오리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숨죽이고 있다

 

  봄은 뱀파이어처럼 온다

  저 산벚나무 피가 낭자하다

 

  Let me in*

  불면으로 누렇게 튼 산수유 입술에서 

  노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의 사랑은 늙지 않아요

  꽃나무 아래 나의 목덜미가 창백하다

     -전문(p. 20)

 

    * ⟪Let me in⟫: 뱀파이어 영화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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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뱀파이어의 봄』에서/ 2022. 11. 7. <시작> 펴냄

   * 우남정/ 2008년『다시올문학』 신인상 수상,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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