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김비주
숨겨놓은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해 여름'은 초록이 빗방울에 돋고 주인이 두고 간 집에는 어린 딸이 마을을 이고, 월북한 빨갱이 아빠의 그늘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간이 몇 개의 다리를 건널 때 편백나무 향은 사람을 부르고 군사정권의 마지막은 고운 첫사랑을 조각냈다
비가 올 때마다 만어사의 물고기들이 노래를 부르고 딸의 유일한 기억의 가족 나들이가 네 살에 머물러 있을 때, 아버지가 남긴 마을의 도서관은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속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비릿한 바람을 몰고 최루탄 속으로 굴렁대며 캑캑거린다
흑백영화처럼 나의 청춘은 영화 속에 돌돌 말려 오랜 시간을 끄집어내야 한다 사라진 모든 것은 풋내 오른 오월의 나무들을 안고 잃어버린 퍼즐을 초록이 우거진 모든 곳에서 복원해야 한다
눈물이 숨은 가장자리엔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애절한 상심이 화면을 뚫고 나와 먼지처럼 내 폐에도 쌓인다
사랑, 고귀하고 상습적인 이야기의 뒤 끝에 매달린 정치의 폭력성과 인간의 나약함이 비에 젖은 풍경을 만든다
아직, 가벼워지지 않는 내 무지의 뒤편에는 절대선이라는 편협한 논리를 가슴 밑바닥에 묻어둔 채, 풍경이 탁하게 덧칠된다
-전문-
* 영화제목
해설> 한 문장: 시적 화자는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에서 "숨겨놓은 사랑을 끄집어낸다"고 진술한다. 모노톤은 하나의 색만 부각해 특정한 심리효과를 불러온다. 화자는 자신이 본 '그해 여름'을 통하여 이 땅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월북한 빨갱이 아빠의 그늘을 뒤집어쓰고" 있는 영화 속 이야기는 붉은색만 부각한 모노톤의 비극이다. 붉은색은 피와 열정의 심리효과를 창출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로만 만들어내었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영화에 투영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내부에 투영된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모노톤으로 부각한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릿한 바람을 몰고 최루탄 속으로 굴렁대며 캑캑"거리던 것이 비극이고 상처였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색으로 부각되는 "오랜 시간을 끄집어내야" 하는 순간은 언제나 힘들다. (p. 26-27/ 론 115-116) (고광식/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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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에서/ 2022. 9. 15. <상상인> 펴냄
* 김비주/ 2018년 <부산문화예술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시 부문 선정, 시집『오후 석 점, 바람의 말』『봄길,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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