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부리성*
전병윤
손자야 누가 어데 사느냐고 묻걸랑
고부 산다고 말하지 말고
외가 동네 이름을 대거라
손자는 기억한다
손자야 할아버지가 누구냐고 묻걸랑
내 이름을 대지 말고
외할아버지의 존함을 대어라
손자는 생각한다
고부군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 중심에 고사부리성
오리誤吏 떼들이 배를 채우려다
허물어진 지 백 년
그 산성 옛 모습을 찾아 놓으니
바람새 이야기가 들린다
바람새 하룻밤이 너무 짧아서
가슴앓이하던 소쩍새
바람새 하루 해가 너무 길어서
눈물 마른 우리 할아버지
동학의 경계를 지나서
태산준령의 경계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악의 경계를 지우고
백성이 주인된 분홍빛 세상 오거든
고부가 고향이라고 말하거라
피 묻은 할아버지 이름을 대어도 좋다
손자는 푸른 기억의 감은 눈을 뜨다.
-전문-
* 고사부리성: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을 중심으로 하여 석성과 토성으로 축성한 산성.
해설> 한 문장: 셋째 연의 '고부'라는 지명과 썩은 관리 '오리'라는 말은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동학운동'이라는 것을 즉시 상기시킨다. 대개의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우리는 할아버지의 발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결과를 대략적이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라도 '고부' 지역은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과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전봉준은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같은 해 5월 10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북상하여 5월 31일에는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다. 이후 동학군은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 · 강원도는 물론 경기· 황해 · 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진압이 불가함을 깨닫고 청국에 요청, 청의 원군이 조선에 들어왔고,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군사를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 · 일 양국 사이에 전운이 짙어지게 된다.
전봉준은 서울로 북진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같은 해 11월 공주 우금치牛金峙까지 진격하였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잘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군의 참패는 필연이었다. 기관포 앞에 죽창을 들고 전략전술도 모르고 싸웠던 일만 여 명의 농민군은 궤멸되고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만 후퇴하다가 뿔뿔이 해산하였다. 전봉준도 순창에서 숨어 있다가 12월 30일 밤 관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4월 23일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물론 동학농민운동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고, 그 맥락은 3 · 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고부민란봉기로 시작되었던 동학운동 자체는 우금치 전투로 1년여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간략한 전개과정과 그 결과다. 이제 우리는 작품에서 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고부 산다"고 하지 말고 "외가 동네 이름"을 대라고 하는지에 대한 커다란 궁금증을 풀게 된다. '고부' 출신 할아버지는 봉기한 지 몇 달 만에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공주까지 북진하였지만 우금치에서의 어이없는 대패로 일순간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 동학운동의 결과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신식 총포 앞에 대나무 창과 깃발이나 들고 제대로 된 아무런 작전도 없이 함성만으로 적에 대들었던 자신들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역시 손자를 향해 "백성이 주인된 분홍빛 세상"이 오거든 그때 "고부가 고향"이라고 말해도 좋고, "할아버지 이름"을 대도 좋다고 자신의 강한 희망을 피력한다. (p. 11-12/ 론 141-143) (호병탁/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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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꽃샘의 영원성』에서/ 2022. 9. 26. <인간과문학사> 펴냄
* 전병윤/ 1935년 전북 진안 출생, 1996년『문예사조』로 등단, 시집『그리운 섬』『바다의 언어』 등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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