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한
정숙자
거기) 잠기지 않으면 자갈이 보이지 않는다
물결도 지느러미 띄워주지 않는다
한 달, 일주일, 하루는 고사하고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거) 마주하지 않으면
미완/미답의 컬러
찾을 수 없다
우선, 많은 나무토막을 깎는다
단단히 마음먹은 뒤
울타리를 친다
팻말도 건다
【〔고독양식장〕】
비가 쏟아지기를 기다린다
태양의 방문 기다린다
드디어 자갈이 움트기 시작한다
숨소리가 물결을 일으킨다
알을 깬 깃털구름
일렁거린다
그거) 풍성해진다, 출발이다, 여기서
환상 저― 너― 머―
고독이 날 점령하기 전 내가 장악한다
돌연변이 고독
거기)서 배양한다, 가꾼다, 다만
개인용이므로 절대 비매품
-전문, 시집『공검 & 굴원』(2022. 미네르바)
▣ 유유한 서정의 물결/ 환상 저-너-머-의 오지奧地 탐험(발췌)_주경림/ 시인
정숙자 시인의 「진무한」은 술술 읽혀지는 시는 아니다. ‘진무한眞無限‘은 “헤겔의 용어로, 무한 누진의 직선적 무한을 뜻하는 악무한에 상대하여 원환적 무한을 뜻하는 말”이다.(다음 국어사전) 원환적圓環的, 즉, 자체 내로 되굽혀진 원으로 출발점도 끝도 없이 닫혀져 있고 항상 궤적을 그려나가 자신에 도달한 선을 뜻한다고 하니 제목부터 녹록치 않다. 그 난해함이 능수능란하게 언어를 다루고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시인의 역량으로 오히려 흥미로운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발화점이 되었다.
“거기) 잠기지 않으면”으로 시작하는 첫 연, 첫 행부터의 돌발적인 일탈에 당황하게 된다. 이어서 “그거) 마주하지 않으면”으로 진행되니 고수高手끼리의 선문답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더욱 애매모호하다. 첫 연이 추상적이라면 많은 나무토막을 깎아 울타리를 치고 팻말도 건다는 둘째 연은 구체적이며 상식의 범주에서 충분히 수긍이 간다. 첫 연에 이어 둘째 연까지 언어의 방목이나 문장의 일탈이 계속되었다면 난해해진 독자들은 아마 떠났을 것이다. 시인의 치밀한 전략으로 이루어지는 다음 전개가 궁금해진다.
울타리를 튼튼하게 친 【〔고독양식장〕】이라니, 언어를 조합해 새로운 말을 만든 시인의 재치가 돋보인다.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이루어지는 무문관 수행법이 떠오르기도 했다. ’고독양식장‘이란 고독을 배양하는 곳으로 여느 생명과 마찬가지로 비와 태양이 필수조건이다. “자갈이 움트기 시작”하고 “숨소리가 물결을 일으”키고 “알을 깬 깃털구름/ 일렁거”려 고독이 풍성하게 배양되면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하여, “출발이다. 여기서/ 환상 저-너-머-”의 시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으리라.
정숙자 시인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움트는 생명력의 에너지를 찾음으로써 자신에게 도달하는 원환적圓環的 진무한에 이른다. 문효치 시인은 이를 “강인한 정신력의 빛나는 정화精華”라 상찬했다. ’고독양식장‘에서 활어처럼 튀어오른 “돌연변이 고독”이 정숙자 시인의 개성적이고 독보적인 시 세계의 밑거름인 셈이다. “개인용이므로 절대 비매품”인 만큼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다.
“에잇,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시인의 말」), 하지만 아무리 먼 광야일지라도 다시 일생을 태운다 해도 시를 쓰겠다는 정숙자 시인이다.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고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공검 & 굴원』 등 10권의 시집과 2권의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를 발간하여 문단의 뜨거운 호응과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의 독창성과 수월성으로 <황진이문학상> <들소리문학상> <질마재문학상> <동국문학상>을 수상했다. ▩ (p. 시 257-258/ 론 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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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계간지 『여기』 2022-가을(54)호 <시 감상>에서
* 주경림/ 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시 당선, 시집 『풀꽃우주』 『뻐꾸기창』 외 2권, 시선집 『무너짐 혹은 어울림』, 한국시문학상 · 중앙뉴스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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