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형 인간
정숙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죽더라도
단 한 번 가슴 속 얼음을 녹이고 싶지
-전문-
<감상평>
▣절대의 세계, 매혹의 세계 __ 이현서/ 시인
- 정숙자 시집 『공검 & 굴원』(미네르바, 2022)
정숙자 시인의 이번 시집 『공검 & 굴원』에서「북극형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이라는 아픔을 통해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철학적인 깊은 사유의 내적 상황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서 죽음을 해체하고 봉인한다.
죽음은 소멸과 하강 이미지로 다가와 일차적으로 삶의 반영일 뿐 아니라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드러낸다. 한편 죽음은 삶의 무의미성을 표상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죽음을 부정적 현실 인식 및 비판 정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삶의 본능과 대립하여 죽음에 대한 본능을 갖는다고 했다. 즉 타나토스적 충동들은 그 자체로 생을 향한 욕망들에 접속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죽음이 삶을 더욱 충만하게 하는 요소로 재구성 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통한 삶의 회복이라는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다 준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맞물려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대칭적이며 역설적으로 서로 비춰주고 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더 오만하고 추해질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삶, 즉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좀 더 겸손하고 내적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인식에 대한 변화 근저에는 죽음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시 「북극형 인간」에서 시인은 죽음을 통해 삶과 생명을 새롭게 볼 수 있는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죽음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삶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북극형 인간」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 아까운 눈동자와 뇌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고독한 존재자로서의 인간 표상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곳 자체가 북극 아닌 곳이 없다고 현실을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햇빛을, 봄을 기다리는 인간을 통해 시인은 삶과 죽음을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하고 있다. 시인은 또 죽음 속에 들어가 보는 것, 죽음을 통과하는 것, 죽음이 타전해 오는 새로운 의미로 해체되고 봉인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요소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우리 시가를 살펴보면 이러한 죽음을 소재로 하여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인식함으로써, 죽음으로 인한 아픔을 형상화하거나, 죽은 사람의 덕과 공을 기리는 작품이 많다.
죽음을 시의 소재로 삼은 작품으로 『공무도하가』나 신라 향가인 『제망매가』는 죽음 자체의 의미를 진지하게 상상해보는 좋은 보기가 된다.
시인은 세계를 보는 눈을 밝히는 자이다.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을 통하여 진실에 닿고자 하는 존재이다.
비록 불온한 현실 세계에서 가슴속 얼음덩어리 하나씩 매단 채 「북극형 인간」으로 살고 있지만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생의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죽음이 곧 삶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북극형 인간」에서 생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시의 지배적 요소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충격이고 안타까움이다. 시인은 그중 가장 아깝고 안타까운 것이 눈동자를 잃는 것이라고 했다. “영롱함, 무구함, 다정함”이 없는 세계는 특히 시인에게는 죽음의 세계이고 폐허 그 자체이다. 뇌의 “직관력, 기억력, 분별력”이 없는 세계 또한 죽음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철따라 피고 지며 매스게임을 벌이고 있는 “색깔과 율동과 음향”은 애틋하면서도 숭고하기도 하다.
시인에게 지상의 삶은 어디나 고통스럽고 근원적인 결핍의 북극이다. 현실에서 북극은 우리의 삶에 존재론적인 한계이며 운명이다. 차갑고 냉혹한 현실에서 시인은 “비, 첫눈, 별자리, 바람”을 위무의 소재로 소환한다. 「북극형 인간」을 통해 시인은 삶과 죽음에 대한 관조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더 깊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절제되고 견고한 시어로 삶과 죽음을 통과한다.
시인은 절대 언어, 절대적 세계를 꿈꾸는 자이다. 절대 세계에 대한 매혹이 곧 시의 세계이다. 단 한 번이라도 가슴속 얼음을 녹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닐까? ▩ (p. 24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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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2-가을(87)호 <시집 속의 시 읽기>에서
* 이현서/ 경북 청도 출생,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구름무늬 경첩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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