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주경림_공검(空劍)의 진면목을 보다/ 정숙자 시집『공검 & 굴원』

검지 정숙자 2022. 8. 30. 03:06

 

    공검(空劍)의 진면목을 보다

      -정숙자 시집『공검 & 굴원』(미네르바)

 

    주경림/ 시인

 

 

  정숙자 시인의 열 번째 시집 공검 & 굴원은 앉은 자리에서 술술 쉽게 읽혀지는 시집은 아니다. 평년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 속에 이마에 땀을 닦아가며 사흘에 걸쳐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극지 으로 시집을 열어 멜랑꼴릭 메두사로 마감했으니 오지奧地 탐험이다. “예술작품은 단순히 우리가 보는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던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사각지대 속으로 안내한다.”는 덴마아크 출신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1947~ )의 말을 상기하며 읽었다.

  시집을 보낼 때마다 시 한 편과 감상을 정갈한 손글씨로 적어 헌 종이로 예쁘게 새로 만든 봉투에 담아 보내주고 자신의 블로그에 시를 올려주는 정숙자 시인이다. 그 정성을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오지 탐험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시집 마지막 장에서 메두사의 머리들은 공중에 매달려 검은 포도송이가 되어가는 것(「멜랑꼴릭 메두사」)이라는 구절을 읽었다. 필자의 손이 닿지 않는 허공이다. “에잇,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시인의 말」), 하지만 아무리 먼 광야일지라도 다시일생을 태운다 해도 시를 쓰겠다는 정숙자 시인과 필자를 비롯한 시인들이 모두 동업중생同業衆生임을 확인했다.

 

  고독을 심문하는 자다

  묻고, 다시 묻고

  발목까지도 귀 기울인다

 

  공검에게는 뭔가,

  단단히 각오해야 하는 날이 있다

  (온다)

 

  바닥으로부터 뛰어내릴 각오

  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할 각오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각오

 

  공검에게 한사코 고독을 투입하는 하늘의 전략: 관계-파열, 그거 아니면 공검은 절대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비애와 비약의 번복은 물론, 더 이상의 이상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선 안 돼. 그래서 안 돼)

 

  갈빗대 사이사이 비계가 끼면 안 되고말고,

 

  모처럼 쪽빛 어릴만하면 어김없이 번지는 안개. 솔방울 잣송이를 파열시키고, 그 벌어진 갈피마다 쪼아대는 지빠귀. 그때 공검은 오만가지 병법/필법을 모색한다. 왜? ㅗ? ㅙ? 꽉 찬 고독, 한순간 허를 찔려 무너질 만한…

 

  꾸깃꾸깃 전모를 실토할 만한…

 

  ∴ 공검*의 한 줄 한 줄은

  고독이 흘린 말 받아 적은 말

 

  아스라이 맞닥뜨렸던

  고독과 공검,

  핏기도 없이 피어린 삶의

  칼집 속 칼날의 붕괴된 침묵

   - 「공검은 끊임없이」 전문

 

  공검空劍*은 정숙자 시인의 신조어로 허를 찌르는 말을 뜻한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공검空劍」)는 시인의 촉수라고 여겨진다. 또한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공검空劍」)을 지녔다니 언뜻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떠올랐다. 관세음보살이 구제할 중생이 많아 천수천안이듯, 공검이 오만 가지 병법으로 한순간 허를 찌르려면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그 이상의 팔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바닥으로부터 뛰어내리거나 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함도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각오를 해야 한다니 세속을 멀리하는 종교적 영역의 결단까지 요구된다.

  시집 제목 공검 & 굴원에서 보여주듯 정숙자 시인은 공검의 병법으로 초나라의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굴원(BC 340?~ BC 278?)의 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도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 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 …나는 아마도 먼- 먼- 어느 산 너머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 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 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목숨 아낄 리 없지

    - 「굴원」 전문

 

  굴원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개혁을 추구하다 모함과 배척으로 유배와 복권을 반복하다가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고결한 삶을 유지하다 스스로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 몸에 돌을 묶고 멱라수에 투신했다. ‘중취독성衆醉獨醒은 굴원의 대표시 어부사漁父辭의 구절로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는 뜻이다.

  3부에는 각각의 시편마다 소제목 미망인을 붙인 죽음에 관련된 시 11편과 혼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싱글턴 가족을 실어 주위 환경과 함께 사는 자신의 모습을 소개했다. 가전제품 필기도구 자질구레한 생활용품과 창문 밖 풍경, 우주로까지 뻗어 나간 네거리와 강··· 깊은 하늘엔 더 먼 하늘로 흐르는 계단까지 아우르는 대가족이다. “모든 죽음은 표절이다”, “생존 또한 표절이 아닐 수 없다(「육식성의 시」)던 관념적인 죽음이 배우자의 죽음을 겪음으로써 육화되어 정감 있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슬프지도 않은데 막 눈물이 나”

  “복이 터지면 눈물도 함께 터지는 거였던가 봐”

   -「공무도주가公無渡酒歌-미망인」

 

  「차원 이동-미망인에서는 꿈속에 나타난 남편을 몰라보고 여보! 하고 한 번만 부르면 곧 알아들었을 것을, 왜 이리 뒤늦게 알아채야 한단 말인가.” 하며 안타까워한다. 시 말미에 원왕생가를 붙여 남편의 왕생을 빌어주는 시인의 진정성이 깃든 애틋함에 읽는 이의 마음도 뭉클해진다. 이 또한 오만 가지 공검의 필법 중의 한 획일 것이다.

  시인의 <고독양식장>에서 배양하고 가꾸어진 돌연변이 고독은 개인용이므로 절대 비매품이라니(「진무한」) 더욱 호기심이 발동한다. 사유-재산」 「저울추 저울눈」 「즐겨참기등에서 돌연변이 고독으로 깊어진 시인의 정신력의 정수精粹를 엿볼 수 있다.

 

  하늘 쪽으로, 하늘 속으로 추락을 거듭한 빙-산,/ 그것은 능히 자산이 될 만했다

  사유의 산/ 사유의 재산이 될 만했다. 세계가 아닌 내 신체-내 지형이 될 만했다

    -「사유-재산」

 

  견디지 않아도 되는 전제란/ 겪지 않아도 되는 존재란/ 그런 생애란 어느 하늘에서도 팔지 않는다

    -「저울추 저울눈」

 

  견딤은 참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견딤은 강제된 인내가 아니다/ 외로운 응전/ 절제된 적응

    -「즐겨참기」

 

  고통으로 점철된 시인의 돌연변이 고독은 book-」 「-」 「묵학」 「틀 효과(framing effect)」 「잎들의 수화등으로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 시인에게 책은 사원이며 첨탑이며 등불인 구원의 손길이다. 하여, “나는 그, 벗을 오래 믿었고/ 나는 그, 분을 오래 기댔고/ 나는 그, 신을 오래 섬겼지// 내 길은 오롯이 그, 분이 닦아주신 거라네(「book-풍」)라는 고백으로 책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진다. 이에 비하여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 푸름 곁」 「엔틱 파일등이 보여주는 작품의 완성도도 높이 살 만하다.

  1988문학정신으로 등단한 정숙자 시인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공검 & 굴원10권의 시집과 2권의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를 발간하여 문단의 뜨거운 호응과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의 독창성과 수월성으로 <황진이 문학상> <들소리 문학상> <질마재 문학상> <동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의 공검에 허를 찔렸을까 구름이 움찔한다. 하늘이 흐려지며 비가 쏟아진다. 울타리를 친 시인의 <고독양식장>의 자갈이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p. 290-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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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창작』 2022-가을(175)호 <좋은 시집 좋은 시>에서

  * 주경림/ 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씨줄과 날줄』『눈잣나무』『풀꽃우주』 『뻐꾸기창』『법구경에서 꽃을 따다』(2019년 1월 e북), 동인지『노래 중의 노래』『가사 중의 가사』『깊고 그윽하게』『시가 중의 시가』, 한국시문학상 · 중앙뉴스문학상 수상, 유유 동인 · 현대향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