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최경은
이삿짐을 싸다가 텅 빈 사무실 벽을 바라본다 긁히고 패인 울퉁불퉁해진 벽,
갈라진 벽에 칠이 벗겨져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새겨있었다
벽을 경계로 집기들이 가려진 밀폐된 공간 속에 비밀스런 말들이 숨어 있었다
사나운 짐승이 되어 서로를 가로막던 벽, 서로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웅웅거리던 말들이 벽을 타고 스멀스멀 구석으로 번진다 다독이며 위로하듯
위선적인 말들이 벽을 키우고 있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책상에 앉아 눈알만 굴리던 사람들, 서로 관심이 없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벽 몰래 은밀히 벽이 되어가는 얼굴들
침침해진 눈,
눈을 감고 벽을 만졌다
내가 만져졌다
무엇이 간지러운지
자신을 가두었던
벽에서 튀어나온 나를 본다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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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온문학』 2021-겨울(30)호 <시가 여무는 창>에서
* 최경은/ 2020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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