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고영민
대낮인데
길가 가로등 몇 개에 불이 켜져 있다
저쪽은 아직 밤인가
낮에 내다 놓은 불빛이라는 것이
때 없고 볼품없어
어떤 밝음은 저 가로등 밑처럼
까닭 없이 어둑한데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야반도주한 낮은
저쪽의 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건너 왔는가, 나는
건너가야 하나
저물어야 다시 건널 수 있는 이곳에서
어둠은 더 먼 어둠을
마주하고 서 있고
늦도록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불빛 아래의 남자는
환한 어둠 속에서
-전문-
▶ 저녁의 미학 -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고영민 시인의 시 세계(발췌) _김용길/ 시인
대낮에 우두커니 켜져 있는 가로등은 그 자체가 까무룩한 어둠이다. 낮에 뜬 반달처럼 가뭇없고 볼품없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 "저쪽은 아직 밤인가?" 백주대낮에 유령이 출몰할 것만 같다. 대낮인데도 밤은 사라지지 않고 저쪽에 피안彼岸의 세계에 서 있는 것이다. 그 거리에는 피안으로 가는 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 듯하다. 그 다리를 건너면 저녁이 기다리고 있고 "어둠은 더 먼 어둠을/ 마주하고 서 있"다. 시인은 넓고 아름다운 강을 건너가고 있다. 피안이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다. 거기 깊이 생의 어둠 속으로 내려간 인간들이 있는 듯하다. 경계가 사라진 세상의 경계에 대해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시의 본질>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 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뀐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p. 시 118/ 론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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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편견』 2021-가을(19)호 <Focus 특집/ 신작/ 작품론>에서
* 고영민/ 충남 서산 출생, 2002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악어』『공손한 손』『사슴공원에서』『구구』『봄의 정치』외
* 김용길/ 199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3년『문학과창작』으로 소설 당선, 시집『아인슈타인의 시』『모르는 곳으로』『장자시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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