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에 들다
이정오
그늘이 붉다
나는 여전히 소화가 덜 된 채
나무 아래서 울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수십 년 동안
되새김질만하다 떠났고
지게 하나 덜렁 남았다
'에미걱정 하지 말고 그만 가거라'
어머니는 절대 나를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한밤중 태반을 삼킨 어미 소가
어린 것을 핥을 때
어미 소의 눈동자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연민은 그 눈동자에서 시작되는 것을
나무는 맨살로 허물을 벗고
해마다 매끈한 한 마디를 뱉는다
폭염을 견디는 이파리들의 거친 리듬 속으로
울음이 천천히 물들어 간다
심중(心中)에 손이 닿으면
꽃으로 웃던 날들이 후둑후둑 진다
* 『열린시학』2012-가을호 <이 계절의 시>에서
* 이정오/ 2010년『문장』으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을 여는 중/ 최도선 (0) | 2012.09.13 |
---|---|
백년 후에 없는 것/ 함기석 (0) | 2012.09.12 |
파일함/ 강서완 (0) | 2012.09.10 |
모텔 바빌론/ 김명서 (0) | 2012.09.10 |
自畵像/ 최서림 (0) | 2012.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