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백일홍에 들다/ 이정오

검지 정숙자 2012. 9. 12. 01:23

 

    백일홍에 들다

 

     이정오

 

 

  그늘이 붉다

  나는 여전히 소화가 덜 된 채

  나무 아래서 울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수십 년 동안

  되새김질만하다 떠났고

  지게 하나 덜렁 남았다

 

  '에미걱정 하지 말고 그만 가거라'

  어머니는 절대 나를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한밤중 태반을 삼킨 어미 소가

  어린 것을 핥을 때

  어미 소의 눈동자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연민은 그 눈동자에서 시작되는 것을

 

  나무는 맨살로 허물을 벗고

  해마다 매끈한 한 마디를 뱉는다

 

  폭염을 견디는 이파리들의 거친 리듬 속으로

  울음이 천천히 물들어 간다

 

  심중(心中)에 손이 닿으면

  꽃으로 웃던 날들이 후둑후둑 진다

 

 

  * 『열린시학』2012-가을호 <이 계절의 시>에서

  *  이정오/ 2010년『문장』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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