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정숙자
가을이
한 사람의 남자였다면
나는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그에게 모든 걸 바쳤을 것이다
그렇게나 맑고
높고
풍요로운 한 남자
꼭이 나에게 주려는 게 아니더라도
그가 들고 섰는 코스모스와 들국화
갈대와 억새꽃
그리고 그 투명한 잠자리들을
별처럼 공중에 띄우는 그
그가 설령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해도
짝사랑할 수 있음에 기뻐하며
귀뚜라미와 함께
온밤을 노래하였으리라
가을이 한 사람의 남자였다면
나는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기꺼이 그를 찬양해 죽는
낙엽이 되었으리라
빨갛게 얼어서 지는 때에도
그 스치는 바람이 달가워
아, 나는 행복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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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이 화려한 침묵』에서/ 1993. 4. 26. <명문당> 발행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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