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산문집 · 밝은음자리표 19

시와 어머니/ 정숙자

시와 어머니 정숙자 어머니는 진실의 이데아다. 진실은 인격의 범주이고 모성은 불변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혼으로 떠돌던 두 발을 떡잎으로 품어주신 어머니는 맑고 따뜻한 대지이며 창공이다. 어머니는 장차 이상을 쥐고 날아오를 어린것에게 걸음마를 가르친다. 자신의 출생에 있어서 어머니보다 더한 빛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떤 장애 앞에서도 휘거나 꺾이지 않는다. 삶의 접점이자 박애의 출발지인 어머니. 진실이 판도라의 상자로 와해 된지 오래지만 어머니의 가슴속에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인내, 그 용기, 그 깊이… 그리움과 사랑의 표상으로서 어머니는 이 땅에 존재한다. 어머님 당신이 떠나신지 오늘로 스무날 째 산촌엔 호젓이 가을비가 내립니다. 그 빗속을 당신이 남기신 그 조그마한 우..

시와 시간/ 정숙자

시와 시간 정숙자 序. 시(時)는 태양의 사원을 뜻한다. 간(間)은 문 안에 든 태양이다. 그러므로 시(時)는 낮에 해당하고 간(間)은 밤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시간에 방류된 생명들이다. 낮과 밤이 순환/순연하는 가운데 자신의 오두막을 짓고, 문을 만들어 달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연보를 엮어나간다. 시간은 형상이 없음에도 개인과 다수의 관계에 얹혀 천차만별․천변만화한다. 태어남은 곧 시간의 열림이며, 누군가의 업적을 논하는 것은 그가 살고 간 시간을 답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은 결코 부서지거나 낡지 않는다. 다만 시간 위에 쌓이는 발자국들이 오래됨과 새로움으로 표기되어질 뿐이다. 흐르는 게 강이 아니라 물인 것과 같이 우리 모두는 태양의 기슭을 지나가는 객이 아닌가.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누..

시와 인연/ 정숙자

시와 인연 정숙자 우리는 흔히 숙명적 운명적 만남을 이야기한다. 그 숙명적 운명적 만남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 인연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숙명은 인(因)이고, 운명은 연(緣)이다. 여기서 의미 분할을 더하면 숙명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져 버린 것을 뜻한다. 즉 출생지, 부모형제, 성별 등이 그 범주다. 반면 운명은 변화가 가능한 기류이다. 친구, 연인, 이웃, 행복, 불행 등등 출생 이후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그 계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 것도 인연이요,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의 인연이다. 숙명 앞에서는 의지가 무효이지만, 운명의 도움으로 우리는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운명에..

시와 천재/ 정숙자

시와 천재 정숙자 천재의 연원은 무엇인가, 혹은 어디인가. 천재는 과연 선천적인가, 또는 후천적인가. 미시적/거시적 세계에 눈을 둔 예술가라면 이 명제 앞에서 한 번쯤 멈추어 보았으리라. 자신은 천재인가, 자신에게도 천재가 잠재하는가, 잠재한다면 몇 퍼센트의 천재가 작용하고 있는가. 장차 천재가 자신을 어둠으로부터 꺼내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천재를 이끌어내야 할 것인가 등등 다양한 의문에 봉착할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있어 천재성이란 생명을 좌우하는 상상력이며, 작품으로 표출되고 검증되는 독창성의 회로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앞바퀴는 늘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는 몇몇 천재들에 의해 굴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의 고독에는 피가 묻는다. 어째서일까? "―어이! 어이!"나는 그에게 올라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