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29

정숙자_ 창문 한 겹 사이의 시(詩)와 시(時)/ 조용한 창문 외 4편 : 수피아

<『포지션』2019-봄호, 무기명으로 '발표/읽기'되었던 시 5편은 『포지션』2019-여름호에 수피아 시인의 작품이었음이 공개됨> 조용한 창문 외 4편 수피아 내 앞에는 네모난 참에 네모난 하늘이 있다. 비린 냄새에 식욕을 느끼며 소파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그녀가 내 등을 쓸어 넘긴다...

정숙자_ 흐르는 상처와 선한 노래들/ 지나가는 사람 : 이환

지나가는 사람 이환 우리는 익숙한 타인입니다 규칙적인 시간을 함께 합니다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고마운 사람입니다 말을 삼가고 있습니다 먼 여행길에도 당신은 늘 거기 있습니다 서로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고 공손합니다 우리는 만나지 않으면서 만나고 만나면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목적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나의 뒤쪽을 나는 당신의 뒤쪽을 향해 걸어갑니다 발자국 소리만으로 단번에 서로를 알아차립니다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배려하는 사이입니다 배려가 넘쳐 어쩌면 외로운 사람입니다 슬픔은 늘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는 서로 철저한 방관자이면서 끝없이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정숙자_내가 읽은 외국시 한 편/ 두 개의 빈 병 : 기유빅

두 개의 빈 병 으젠느 기유빅(1907-1997, 90세) 헛간의 구석에 두 개의 빈 병, 바람은 기와지붕과 사방의 벽을 흔들고 있다. 지구의 중심이 끌어당기고 빛이 붙잡고 있는 두 개의 초록색 병. Deux bouteilles vides Eugene Guillevic Deux bouteilles vides Au grenier dans un coin. Le vent secoue les tuiles Et la charpente. Deux bouteilles bertes Qu′attire le centre de la terre Et que retient la lumière. *출전 : 『가죽이 벗겨진 소』, 1995, 솔/ 이건수 옮김 ♣ 관조 · 분석 · 압축 으젠느 기유빅(프.Eugene Guillev..

정숙자_2018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심사평/ 이방인 : 이소현

中 이방인 이소현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 오아시스의 밤은 낡은 허물만 남겨 주었고 낮은 아지랑이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허물어졌다 갈대를 엮어 만들었다는 밀짚모자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갈대는 매정한 허공을 찔러댔지만 태양은 비 대신 땀을 선물해주었지 물 한 병은 십 달러 십 일의 하루를 견디는 가격이라서 혀 밑으로 달콤한 온기를 숨기곤 했어 쉽게 녹아내리던 단어들 지나온 발자국으로 써 내린 이야기 결국 한숨들은 짓궂은 모래바람에 지워질 것이다 사막여우는 열을 뱉어내는 법을 알지만 나에겐 옹골진 귀조차 없어 지나친 그림자로 귀를 틀어막고 사막을 건넜지 더 먼 곳에 닿으면 빛이 있을까 스물의 귀퉁이는 쉽게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