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작품론/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 천재 시인 - 맹문재

검지 정숙자 2010. 10. 29. 01:44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 천재 시인

    

      맹문재

 


   1

   정숙자 시인의 시편들에서 우선 관심을 끄는 소재는 ‘책’이다. 책의 사전적 개념은 인간의 사상, 감정, 사실 등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종이를 꿰맨 것인데, 오늘날에는 전자 자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정숙자 시인이 소재로 삼고 있는 책은 전자 자료는 아니고 인쇄물인데, 지금까지 6권의 시집을 상재한 뒤 큰 변화의 시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소재로 보인다. 


     우리 집 살림살이 여행보다 책이 알맞다

     초원이나 내뻗은 강 눈앞에 없을지라도 책 속에는 한 그루 보리수가 자란다

     가지를 따라 하늘이 넓어지고 새들이 날고 잎새들 달랑달랑 바람을 닦는다

     오래된 책들은 어느 갈피에서도 등을 보이지 않는다

     구 시린 누옥(陋屋)에 군불 지필 몇 마디 말씀 잊지 않는다

     세월 거느린 보리수는 어떤 고비에서든 상큼상큼 아침을 연다

                                                                 -「지구여행권」부분


   “책 속에는 한 그루 보리수가 자란다”라는 면에서 시인의 책에 대한 태도를 여실히 볼 수 있다. “보리수”는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는 만큼 소중한 대상이다. 시인은 그 보리수 만큼 책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오래된 책들은 어느 갈피에서도 등을 보이지 않는다”라거나 “귀 시린 누옥(陋屋)에 군불 지필 몇 마디 말씀 잊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집안의 살림살이 중에서 그 무엇보다도 “책이 알맞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책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작을 하는 시인에게 책은 불가결 필요한 것이지만 책에 의존하는 것은 직접체험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기에 위험할 수도 있다. 시는 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의 산물이지만 그 근저에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책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양분으로써는 필요하지만 졍도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이 책을 중요하게 여기는 근거는 다음의 작품에서 알 수 있다.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갈피마다 바람 불고 여백에서 풀이 자란다

     행간을 타고 세월이 흘러든다

     오후 네 시/ 금요일/ 시월쯤으로 해 두자

     이 모두가 쉰셋의 각도로 기울어진 나의 오늘이다


     ․ 인간은 인간적일 때만 인간이다

     ․ 열심히 기는 것이 나는 것이다

     ․ 죽었다는 소식은 죽어간다는 안부보다 따뜻하다


     시시각각 문장이 지나간다

     누가 누구의 책을 읽더라도 그것은 자신을 읽는 것이다

     자신에게 밑금 치고 자신을 외운다

     자신과 먼 것은 기억이 묽다

     내가 쓴 몇 조각 글도 내가 읽은 나 자신에 불과하다

     동서고금 양서들 또한 자신을 탐독한 이들이 생애를 걸고 찾아낸 자신이었음을

                                                                    -「둥근 책」부분


   시인은 책을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 대상으로 인지하고 있는데, 이 점이 책을 소중히 여기는 근거가 된다. 진정 시인에게 책은 속독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빨리 지식을 습득하고 빨리 정보를 수집하고 빨리 결과를 얻는 대상이 아니라 천천히 “자신을 읽는” 대상인 것이다. 김현이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진단했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진정 자신을 읽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이 보여주는 삶과 합치되거나 혹은 배반되는 경험을 한다. 책의 세계를 통해 즐거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그와 같은 과정을 오래 경험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게 되는데,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경우보다 보편성을 띄는 것이다.

   시인이 책을 속독이 아니라 정독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자신을 진지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인식해서이다. 시인이 그와 같은 인식을 갖는 것은 책이 “자신을 탐독한 이들이 생애를 걸고 찾아낸” 산물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열심히 기는 것이 나는 것이다” 같은 문장에 밑줄을 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적일 때만 인간이다”라는 문장 앞에서 잠시 호흡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본다. 시인은 자신의 가치관과 합치되는 책의 세계관을 발견하고 삶의 나이테를 또 한 켜 늘리는 것이다.

   책을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 대상으로 여기는 시인의 태도는 점점 경쟁의 속도가 높아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히 속도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 극복의 대안으로써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 자본의 이익을 위해 무한경쟁을 벌인다. 그 경쟁에서 앞선다거나 우월하다는 것은 곧 속도를 낸다는 의미이다. 속도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원천이어서 모든 영역에서 예외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 책을 읽을 때에도 가능한 한 속독한다. 속도를 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기에 지치고 갈등을 느끼면서도 따른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나름대로 얻고 있지만 진정 자신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자신을 진지하게 읽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정독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속도의 가치 기준에 대항하는 행동이다. 단순한 감정적인 대항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진지한 전략의 수행이다. 마치 밀란 쿤데라가『느림』에서 속도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느림의 행동을 제시한 것과 같고,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끊임없는 욕심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속도 지향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데 걸린 시간이 겨우 40여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는데, 개인에 대한 사회보장이 매우 빈약해 경쟁을 통해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더욱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책을 정독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중요한 가치이다. 느리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게으르게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또한 남을 제치고 살아가는 경쟁적인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책을 정독한다는 것은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자세로써 “내가 쓴 몇 조각 글도 내가 읽은 나 자신에 불과하다”고 자기를 겸허하게 바라봄이다. 곧 무위(無爲)의 지향과 상통하는 것이다.


   2    

     어쨌든 매달리자

     아망스런 손 달렸으니 매달리자

     매달리기 좋은 손가락으로 매달리지 아니함도 모종의 낭비

     염탐 말자 어디건 매달리자

     아느냐 쌀밥, 아니면 보리밥이라도

     힘껏 매달리다보면 까치밥이라도 될는지 누가 아느냐

               (중략)

     매달리지 않고 여무는 빛 있을까

     삶이란 매달림

     살아남았음이란 매달렸음

     매달릴 바에야 힘껏 매달려 충실히 익자

                                          -「無爲集 ․ 7 열매는 매달림의 언어다」부분


   정숙자 시인의 시편들에서 중요한 또 다른 소재는 무위이다. 무위는 노자(老子)를 위시한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제일 격이 높은 말이다. 무위란 아무 것도 안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공적이고 자의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래 우주 자연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自) 그렇게 되는(然)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제 스스로 운행하고 변화하는 자연에 따를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무위는 도나 정치에 관해서도 작위성을 띠지 않는 것을 제사한다. 그리하여 『노자』제2장에서는 성인은 무위의 자세로써 세상사를 처리해야 된다(成人處無爲之事)라고 하고 있고, 『노자』제37장에서는 도는 작위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道常無爲而不爲)라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위는 결코 무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움직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쨌든 매달리자/ 아망스런 손 달렸으니 매달리자”라는 인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무위는 욕심이 아니라 욕망이다. 김형효가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에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듯이 욕망은 본질적으로 결핍에서 발생한다. 욕심은 소유하려고 하지만 욕망은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욕심은 언제나 지배권의 논리와 밀접히 관련이 있지만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욕심은 소유를 위해 투쟁하지만 욕망은 자신의 결핍을 위해 싸운다. “삶이란 매달림/ 살아남았음이란 매달렸음/ 매달리 바에야 힘껏 매달려 충실히 익자”와 같은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그 욕망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성의 운명이다.

   무위당(無爲堂) 장일순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 무위는 자애와 같다고 말했다. 자애라고 하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관계는 나와 너라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관계, 동체라고 하는 관계, 무아의 관계이다. 무위라고 하는 것은 그런 속에 있어서의 하나의 행위의 양식으로 계산법이 없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롭다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무위당은 자신의 논지를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농사꾼이 씨앗을 뿌렸는데 움이 트긴 텄는데 이것이     말라죽게 된다고 할 적에 수없이 공을 들이고 물을 주고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시장에 가서 앞으로 값이 어떻게 된다, 이건 키워 봤자 먹을 만한 물건도 안된다 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살아야 하겠으니까, 죽는 것은 볼 수가 없으니까     거기다 물주고 거기다 거름도 주고 퇴비도 주고 거기에 맞게끔 모든 정성을 다 들인다      이 말이에요. 그것은 계산을 본다고 할 적에는 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무위의 극     치는 그런 거다 이 말이에요.(「자아와 무위는 하나」. 60쪽)


   정숙자 시인의 무위사상 역시 무위당의 사상과 같다. 시인이 책을 정독하고 시를 쓰는 것은 무위를 지향하는 것이다. 무위를 지향하기 위해 책을 정독하고 시를 쓰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 쓰기에 욕심 부리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고 채우려고 욕망을 품을 뿐이다. 마치 무위당이 위의 글에서 예로 든 것처럼 농부가 말라죽게 된 곡식을 내버려두지 않고 정성들여 살리는 것과 같이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이기적인 계산이 없고 단지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곧 주체적으로 타자를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3

     정다운 오솔길, 얼었다 풀린 진흙길, 예기치 않은 빙판길, 돌아나온 골목길, 땡볕 깔린     자갈길, 툭 터진 바람길, 별 쏟은 난바닷길, 앞뒤 모를 굽이길, 구름 고운 뒤안길, 하늘만     믿는 비탈길…… 자,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길인가?

                                                           -「길에 대한 리서치」전문


   위의 작품에서 시인이 언급하고 있듯이 인간은 많은 길을 만난다. “정다운 오솔길”이나 “구름 고운 뒤안길”을 만나기도 하고, “얼었다 풀린 진흙길”이며 “예기치 않은 빙판길”을 만나기도 한다. 또한 “돌아나온 골목길”이나 “땡볕 깔린 자갈길”을 만나기도 한다. 시인은 위와 같은 많은 길 중에서 “자,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길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것은 시인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길이며 독자들에게 바라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곧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으로, 시인이 지향하고 있는 시 쓰기의 길이며 나아가 무위를 지향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와 같은 길을 자신이 꿈꾸는 천재의 길로 인식하고 있어 또한 주목된다.


     천재는 결코 노력을 결여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재란 노력가이며, 노력의     힘은 집요하고 거칠어 여타의 환경을 문제삼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많은 천재들은     그와 같은 돌파력으로 자기를 연구했다. 펼쳐야 할 가지와 잎새, 꽃과 기둥, 열매와 창공     이 바로 자기라는 씨앗 안에 내장되어 있으니 말이다. 만 권의 책을 독파하고 외우더라     도 그것은 자신의 예술에 도움을 줄 뿐, 단 한 구절도 자신의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영양 공급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중략)

     지적 균형을 완벽하게 갖춘 천재도 있다고 롬브로조는 천명하였다. 작품은 물론이려      니와 타인의 마음에 상처주지 않는 인간형 천재를 나는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또한 찾는다.


   위의 글은 정숙자 시인이 『애지』(2004년 겨울호)에 발표한 「시와 천재」라는 산문이다. 위의 글을 읽으면 시인이 책을 정독하는 이유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것임을, 시 쓰기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받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시인의 책 읽기는 장편의 원본보다 요약본을 선호하는 시대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빠른 음악과 빠른 장면이 전환되는 영화가 인기를 끄는 추세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속도 경쟁으로 인해 생기는 피상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들뜨지 않는 것으로 삶의 결과보다도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고, 흥분과 같은 화려함보다 담백한 느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시인은 천재란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천재가 되기 위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고 한다. 불안한 인간 존재를 그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어느 바보의 일생」까지 읽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지적 균형을 갖춘 천재가 되려고 한다. “작품은 물론이려니와 타인의 마음에 상처주지 않는 인간형 천재를 나는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또한 찾는”것이다. 시인은 그 천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결핍을 부단히 채우려고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1991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

                   시론집『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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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지> 2005-봄호 / 애 지 초 점 | 작품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