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빨간 웃음▼/ 허정

검지 정숙자 2022. 3. 22. 01:29

 

    빨간 웃음

 

    허정

 

 

  실낱 같은 인연 하나 스친 적 없는 길냥이를 묻기 위해

  삽과 괭이를 든다는 것은

 

  나의 무덤을 내 손으로 파 보는 예행연습 같은 것

 

  겨울나무의 얼어붙은 뿌리와 뿌리 사이

  강보에 싸인 아기의 부피와 질량이 덮일 만큼

  구덩이를 파는 동안

  이 말도 되지 않는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녀석의 푸석푸석한 사체와

  갈참나무 옆에 기대어 있던 삽과 괭이는

  왜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왜 나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언 땅을 괭이로 파내고 그 자리에 낙엽을 깔고

  시신으로 만난 인연을 다듬잇돌 크기의 구덩이에 눕혔는지

 

  왜 그때 하필이면

  겨울 햇빛이 녀석의 흰 이빨에 반사되어

  내 눈동자에 빨간 웃음으로 박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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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2-2월(386)호 <신작특집>에서

  * 허정/ 2002『시와 생명』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