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먼 곳에서 도는 새벽/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22. 3. 20. 00:28

 

    먼 곳에서 도는 새벽

 

    정숙자

 

 

  열 달 동안이나 덮어놓고 살았어

  시 한 줄 쓰지 않고 (ㅎㅎ) (ㅋㅋㅋ)

  그렇게 살았다면 아무것도 안 한 거지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지 않는데 잡히지도 않는데

  썼다면, 그건 억지였거나 헛것이거나 사기였겠지

 

  열린 열 시에도 유리창 너머 리기다소나무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워있을 수 있는 자유. 일상에 대한 강박 없이 퍼져버릴 수 있는 멈춤. 그 늘어진 자유의 무거움을 아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침묵밖에 남은 게 없는 공간을 (ㅎㅎ) (ㅋㅋㅋ) 무작정 견디었지만

 

  억지였거나 헛것이거나 사기였거나

  어쨌든 써야 했을까

  카지노에 빠진 게이머와는 다르니까

  우리에게 시는 인생이니까

 

  다시 세워야 할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당장은 불이 안 붙고 타닥거릴지라도

  나중에는 중심을 잡고 타올라 줄까?

 

  그런데,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 열 달 동안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어

  모순을 부질없음을 초저녁별이 어둠을 본 만큼 봤어

  그런데도 촛불이 다시 타올라 줄까?

     -격월간 『시인플러스』 2013.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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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공검 & 굴원』(4부/ p. 102-103)에서/ 2022. 5. 16. <미네르바>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