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배남효

검지 정숙자 2021. 7. 29. 02:43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배남효

 

 

  새봄이 돌아오니 경주 시골집 홍매화가 곱게 피어나고, 백매화도 깨끗하게 피어났다. 매화꽃의 화사한 모습을 보고 향기를 맡으니, 이제야 봄이 확실히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방안에 홍매화가 활짝 핀 가지를 꺾어 물병에 담아 놓으니 향기가 가득 진하게 풍겨난다.

  예로부터 매화는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깨끗한 꽃을 피워내며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려주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꽃으로 칭찬을 받아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혹한酷寒을 뚫고 곱게 피어난 향기로운 매화를 칭송하고,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겨 시화詩畵로 그 지조와 절개를 즐겨 표현했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매화불매향梅花不賣香이라는 대표적인 말로써,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높은 품격을 상징적으로 비유했다.

 

  조선시대 선비 신흠(申欽, 1566-1628, 66세)이 쓴 시로부터 유래한 매화불매향은 매화의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는 유명한 말로써 지금까지 전해온다

 

  오동나무는 천 년이 지나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買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이 시는 신흠이 쓴 야언野言이라는 문집에 나오는데, 매일생한불매향은梅一生寒不買香은 퇴계 이황도 좌우명으로 삼아 가까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신흠은 뛰어난 문사文士답게 이렇게 절묘한 시어를 만들어서, 매화를 사랑하는 선비와 여인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말로써 즐겨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다.

  또 이 시는 전체적으로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묘미를 느끼게 한다. 오동나무와 매화 그리고 달과 버드나무를 들어 그 특질을 쉽고도 빼어나게 노래해, 읽는 이로 하여금 깊게 생각하게 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사물을 바라보고 본질을 짚어내는 탁월한 통찰력이 없이는 나오기 힘든 표현으로, 음미할수록 그 멋과 맛이 그윽하게 느껴지고 여운도 길게 남는다.

 

  나는 글과 그림으로 매화를 알고 지내다가, 뒤늦게 경주의 시골집으로 이사 와서 직접 매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 이사 와서 형님이 농장 옆에 캐어 버려진 매화나무 일곱 그루를 가져다주었다. 나무 굵기기 10센티도 넘는 상당히 오래 자란 나무였는데, 뿌리를 많이 끊어내고 줄기와 가지도 싹둑 잘라 버려진 것을 가져왔다고 했다.

  나무들이 아주 많이 잘린 상태인데 과연 살아날지 반신반의하면서 심었는데, 놀랍게도 이 나무들이 한 그루를 뺴고 여섯 그루가 살아나서 감탄했다. 고목 같은 매화나무에 새순이 돋고 잎이 자라더니 다음해 봄에는 하얀 꽃을 피워내어, 그 늙은 등걸에 고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면서 생명의 신비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더니 바로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해, 두세 달 지나니 영글어서 매실을 따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시골집 마당에 매화나무를 기르게 되었는데, 그 후 이 매화나무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이상하게 나타나 다시 놀라기도 했다.

  한 해를 더 지나니 겨울 추위가 심해서 그런지 잘 자라던 매화나무 한 그루가, 봄이 와도 줄기가 검어지고꽃이 피지 않더니 잎도 나지 않고 죽어버렸다. 또 한 그루는 다음해에 꽃이 피지 않고 죽어버린 것 같더니, 갑자기 밑둥치에서 목숭아 줄기가 솟아올라 순식간에 잎이 무성한 복숭아나무로 크게 자라났다. 다음해에 키 큰 복숭아나무에 북사꽃이 붉게 가득 피어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는 또 다음해에 곧바로 죽어버리는 희한한 일이 생겨났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는지 살펴보니 나무의 밑둥치에 접붙인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알고보니 복숭아나무 뿌리에 매화나무 줄기를 접붙이기 한 것이었다. 매화나무의 등걸이 오래 되어 성장이 시원찮으니, 뿌리의 생명력이 원래대로 복숭아나무 줄기를 솟아나게 해 매화나무는 죽고 복숭아나무로 자란 것이었다. 그 복숭아나무가 너무 갑자기 많이 자라서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시 왕매실 묘목을 몇 그루 사다 심었더니 잘 자라났다. 삼 년이 지나니 흰꽃이 곱게 피고 매실도 굵게 열리기 시작했다. 이런 사연을 겪으면서 매화나무를 가까이 하게 되어, 꽃도 보고 열매도 따서 매실 원액을 만들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이제는 해마다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머잖아 곱게 피어날 매화꽃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붉게 하얗게 피어나는 매화꽃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인생도 새로워지는 설렘이 일어나는 것이다.

  매화는 새봄에 일찍 꽃이 곱게 피고 향기가 좋아 반갑고 아름다운 나무이다. 더욱이 열매까지 따 먹고 돈까지 벌게 해주니, 농민들에게는 아주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게다가 매화불매향이라는 시문으로 감상하게 되어, 매화꽃을 통해 인생사의 멋과 맛을 더해주니 더욱 좋은 것이다. 이렇게 곱고 유익한 벗처럼 생각되니, 올해는 매화같이 향기롭고 깨끗한 인생을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   

 

  * 블로그 참조)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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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문예』 2021-봄(92)호 <수필>에서

  * 배남효/ 2019 ⟪문화분권⟫으로 등단, 저서『사기史記의 인간학』(사마천의 사기를 풀이한 인문교양서), 북촌학당 강학